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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Mar 12. 2022

나의 이혼이야기.18

18.타인의 시선

자살자 가족의 삶이란 그렇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에서 계속 헤엄치고 있는 것과 같다. 지치면 그 물속에서 같이 빠져버리는.



 아버지의 장례식 때 생각보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주셨다. 많이 알리고 싶지 않은 죽음이었지만 입 소문이 워낙 빠른 곳이라 소문은 소문을 타고 생각보다 많은 어른들부터 청년들, 목사님까지 와서 위로해주시고 예배를 드려주셨다.


 그렇게 와 주신 분들이 감사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까지 와주셔서 위로가 되고 감사했다. 하지만 사인이 사인인지라 우리 가족을 비롯해 나는 충격에 빠져 있었고 손님들이 오셨을 때만 잠시나마 잊을 수 있던 심란함은 손님이 가고 나면 더욱더 심란함의 심연으로 나를 빠트렸다.


 그런데 장례가 끝나고 삼우제가 지나고 그 주 주말. 그 사람은 나의 이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교회에 가서 예배 때 인사를 하자는 게 아닌가. 보통은 장례가 끝나면 그다음 주나 다다음주쯤 오셔서 인사를 드리곤 하는데 장례식 끝나자마자 나에게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와주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자고 했다.


 난 다음 주쯤 가자고 했다. 이번 주는 아직 추스를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완강했다. 와준 사람들의 고마움을 생각해서라도 바로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난 만신창이인 몸과 마음을 붙잡고 그 주에 교회에 갔다. 쑥덕쑥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어느 누구도 장례를 치르고 이렇게 빨리 교회에 와서 인사드린 사람은 없었다. 그때 나의 심리 상태로는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곳에 있으니 오히려 더 감정이 요동치며 미칠 것 같았다.


 드디어 교회 광고 시간이 되었고 목사님께서 "아버님 장례를 잘 치르고 오늘 예배에 참석했다"라며 우리를 소개했다. 그리고 난 무너져 버렸다. 일어나서 인사를 드리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서러운 눈물이 나와 도저히 예배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교회 예배당 복도에 나와서 흐느끼며 눈물로 울고 또 울었다. 내 울음소리는 예배 축도 송에 묻혀 들리지 않았고 서 있을 수가 없어 복도 의자에 앉아 울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나왔다. 그 사람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 나를 부축해서 차로 갔고 교회 사람들조차 왜 벌써 왔냐고 힘내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나에겐 그 순간이 어지러운 카메라를 돌리는 듯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선명한 감정. 난 치욕스러웠다.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날 세우고 인사를 시키고... 분명 나는 이번 주는 힘들다고 말했건만 그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 분들이냐, 다들 이렇게 와주셨는데 당장 이번 주에 가서 감사하다고 해야지 이번 주 예배를 안 가는 게 말이 되냐'라며 내가 무슨 배은망덕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억지로 그 자리에 인형처럼 갖다 놓고 결국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온 교회 사람들이 다 보게 한 그 사람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제대로 된 애도의 시간을 갖지도 못하고 그렇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울면서 교회를 나온 그날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죽음 후 우리 가족들은 너무나 힘들었다. 원래 서로의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번 일을 통해 더욱더 그런 관계로 고착되고 말었다. 표면적인 대화만 나누는.


 그 누구도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심한 두려움이 우리 안에는 늘 있었다. 서로가 전화 통화가 되지 않거나 이른 아침이나 밤에 전화가 울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난 물에 빠지려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빠지지 않게 붙잡고 애쓰는 행태였다. 하지만 그런 삶은 물에 젖은 솜처럼 자꾸만 무거워져 난 기진맥진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다들 날 효녀라고 했지만 사실 난 내가 무서워서 내 만족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미워지기 시작했고 언니들도 미웠다. 언니들은 아침10시즘이면 나에게 전화해서 "엄마한테 갔니? 아직도 안 가고 뭐했어?"라고 날 대했고 나의 매일매일은 친정 출근으로 채워졌다.


 정신과 선생님은 지금처럼 매일 그렇게 하다 보면 '어머니가 미워질 수 있다. 그러기 전에 요일을 정해서 이 날 이 날 가겠다고 정하는 것이 당신을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좋다. 이건 장거리 레이스 같은 것이다. 길게 가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충고하셨다.


 그러나 난 이미 어머니가 미워지고 짜증이 난 상태였다. 아침이면 오는 전화. 왜 안 오냐는 무언의 압력. 거기다 우리 어머니는 까다롭기까지 해서 자기 고집이 세고 싫어하는 것도 많았다. 한 번은 옷가게에 가서 이건 어때 저건 어때 권유하는데 싫어 싫어 싫어만 반복했다. 


 점원분이 나에게 오시더니 귓속말로 살짝 "어머니가 정말 까다로운 분이신데 대단하셔요"라고 하셨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도 그 상황에서 '맘에 드는 거 없음 그냥 사지 마. 집에 가자!'라고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냐고 하지만 그건 깨물 때 이야기이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다섯 딸이지만 어머니는 다른 언니들한테는 유난히 눈치를 보고 어려워했지만 나와 둘째 언니는 편하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만은 지나치게 어린애같이 굴곤 하셨다.

 

 그나마 내 처지를 이해해주고 내 고충을 알아주는 자매는 둘째 언니였다. 다른 언니들을 날 재촉해 어머니를 돌보게만 했고 어머니의 이중적인? 모습을 아는 것은 그나마 둘째 언니였다.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일에 절어서 힘들게 지내고 나는 나대로 힘들고 하루하루 젖은 솜 같은 나날 속에 하루는 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사람이 출근도 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난 어머니네 있었는데 전화를 하니 전화가 꺼져있었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택시를 타고 혹시나 해서 집에 와보니 떡진 머리에 부르튼 입술 정말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의 그 사람이 있었다. 난 무슨 일이냐, 왜 그러냐 했고 그 사람은 완전 하앟게 타버린 듯 영혼조차 없어 보였다. 


 일단 지사장님께 집에 있는데 상태가 이렇다고 하고 통화를 시켜드리곤 그날은 휴가를 얻게 했다. 일의 버거움으로 녹다운된 그 사람이나 나나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낙엽처럼 우리의 하루하루는 밟으면 부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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