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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Mar 07. 2022

나의 이혼이야기.17

17.취직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는 듯 눈에 보이는 어떠한 큰 것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의 내면에는 엄청난 물결의 파도가 끊임없이 후회와 원망의 모래를 쓸고 지나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렇게 평생 증오하면서 살아오셨지만 막상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일단 건강이 갑자기 쇄약 해지셨다. 어머니도 당뇨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여장부처럼 어디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안 하셨던 분이 온몸이 아프기 시작하셨다.


 난 어머니까지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 되고 두려웠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죽고만 싶었다.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극심한 우울증이란 생각에 정신과를 갔다. 십여  전만 해도 정신과를 다닌다고 하면 조심스러운 이미지가 있었기에 정말 용기를 내서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이러다 정말 나까지 잘못될  같아서. 정신과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그런 날들 속에서 이번엔 시할머님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열흘 좀 지나 퇴원을 하실 수 있게 되었는데 병원비가 문제였다.


 고모들-시할머님의 딸들-은 자기들과 그 사람, 시누이, 시여동생까지 해서 병원비를 나눠서 내자고 했고 시누이는 왜 우린 손자 손녀인데 우리들까지 끼우냐, 우리는 병원비를 낼 수 없다, 아니면 고모들 자식들도 내라고 해라 이런 갈등 상황이 빚어졌다.


 이런 상황이 속상하고 속상했던 그 사람은 우리가 병원비를 다 내겠다고 말을 했다고 나에게 전했다. 우리도 돈을 낼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당혹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난 늘 그랬듯 '그래, 알았어.'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의 나의 불만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우리가 돈을 내는 거? 아니. 나에게 상의하지 않고 통보하는 그 사람의 태도였다. 하다못해 '상황이 이러이러해서 이번 병원비는 우리가 내는 게 어떨까?'라고 한 번이라도 물어봐줬다면 내가 '절대 그럴 수 없어.'라고 할 사람이 아닌데. 왜 항상 선 결정, 후 통보일까.


 병원비를 어떻게 내야 하나 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 사람이 외국회사의 한국지사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서 꽤 고가의 연봉으로 취직이 되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온 그날 새로 들어갈 회사-한국지사라 전 직원이 4~5명밖에 안되었다-사람들과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해 온 그 사람이 나에게 울면서 하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각난다.


 "이제 할머니 병원비... 낼 수 있어... 흑흑흑...."


 사실 난 그 사람이 고가의 연봉으로 취직했다는 것을 듣고 아... 아버지가 조금 더 살아계셨다면 용돈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덕분에 좋은데 취직했다고 말할 수 있었는데 란 생각부터 들어서 눈물이 났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이유로 안고 울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하진 않았다. 그러면서 이 사람도 병원비랑 할머니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싶어서 위로해줬다. 얼마나 힘들게 대학원을 다녔는지 알기에 그리고 고모들과 시누이들이 척을 져서 서로 안 보려고 하기까지 간 갈등상태를 알기에 그 마음이 참 힘들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 나와 우리 가족은 없었다.






 그리고 난 일하던 대학원 연구실을 그만뒀다.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도 너무 걱정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어머니 보모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출근, 저녁 먹고 퇴근. 출퇴근 장소는 친정. 언니들은 다 회사를 다닐 때였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 어머니는 혼자 있어야 했다. 나의 백수 생활은 그렇게 하루하루 어머니와 늘 함께 채워졌다.


 하루는 광장시장에 가고 하루는 백화점에 가고 하루는 집에서 뒹글 거리다가 집 앞 대형마트를 가고... 말 그대로 어머니의 기쁨조가 되었다. 사실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는데 어머니 앞에서는 호들갑을 떨고 신난 사람처럼 말하곤 했다. 그리고 집에 오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 나쁘지 않았어'라는 피곤함으로 기절하듯 잠이 들곤 했다.


 광장시장이나 어딜 가면 어머니는 꼭 시할머님의 옷을 하나라도 사주셨다. 가격을 떠나서 그래도 자주자주 옷을 사드리고 챙겨드리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의 취직 생활은 대학생활보다 더 힘들었다. 세계 각국의 지사와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시차 때문에 거의 24시간을 일했다. 일을 하고 또 해도 끝나지 않는 듯했다. 3분 정도만 안 봐도 메일이 100여 통 이상이 쌓이자 그 사람은 점점 버닝 아웃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힘들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힘들고. 서로 힘든데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마음속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너무 지치고 힘들면 말을 하고 대화하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라 그것조차도 귀찮을 때가 있다. 둘 중 한 명이 노력해도 한 명이 짜증 내버리는 상황. 그래서 우린 피곤할 때는 서로 웬만하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피곤할 때 이야기를 하면 싸울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사람은 갑자기 재무상담을 받으러 가자고 했다. 엉겁결에 끌려가듯이 간 곳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 아저씨가 있었고 한참 무슨 영상을 보여줬는데 결론은 연금 변액보험에 가입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덜컥 200만 원을 가입하겠다고 했다.


 난 깜짝 놀라 그건 너무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매달 내야 하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200만 원이 무슨 말이냐... 일반 적금도 아니고 연금 변액보험은 중간에 해지하면 원금 손실이 상당한 상품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빨리 목돈을 만들고 싶어 했다.


 우리의 돈 관리는 그 사람이 했는데 결혼하고 첫 달 돈 관리를 내가 해보니 너무 정신이 없었다. 나는 셈 계산이 빠른 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 사람에게 넘기고 용돈을 받아 지냈다. 그게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는 이혼하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결국 우린 연금 변액보험에 가입을 했고 믿음이 안 가는 아저씨는 기분이 좋은지 우리에게 저녁까지 사주었다.


 연금보험을 내자 생활이 더욱 쪼들려졌다. 그 전에도 카드값 등으로 힘들었는데 200만 원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견디다 못한 내가 "나 취직할까? 뭐라도 해서 돈을 더 버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아니야, 적어도 한 명은 원하는 삶을 살아야지. 300만 원 이상 벌어올 거 아니면 일하지 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 사람이 날 이만큼 생각해 주는 구나. 멋진 남편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아량? 덕분에 나는 취미 부자가 되었다. 나에게 300만 원을 줄 회사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진작에 포기하고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제2의 직업을 찾기 위해 미싱, 꽃꽂이, POP, 캘리그래피 등등을 배웠다. 하지만 제2의 직업을 찾으려는 나의 노력은 매번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프리랜서로 돈을 벌고 싶었는데 그 일들이 돈벌이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쁨조라는 역할은 점점 나에게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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