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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Apr 02. 2022

나의 이혼이야기.25

25.경매에 빠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경매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무료하고 지루하던 일상에서 뭔가 다이나믹하고 드라마 같은 자극이 찾아왔다고 할까. '경매 그거 돈 없는 사람, 사업하다 안 좋게 된 사람들 꺼 빼앗는 거 아냐?!'라고 불같이 화내던 나는 어느새 하루 종일 경매 물건을 검색하고 있었다.


 경매 물건의 내용을 보면 그 집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어떤 일이 대충 있었는지, 아 이 집은 자녀가 사업자금으로 빌렸다가 부모님 댁이 경매로 나갔구나... 이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때는 경매가 완전 인기를 타던 시기였어서 경매장에 사람이 미어터질 때였다. 나는 행동대장 역할, 그 사람은 사령탑 역할을 해서 우린 열심히 경매에 입찰했다. 어찌어찌 모은 종잣돈 3000만 원으로 덤빌 수 있는 물건은 대출 70%를 생각할 때 1억 근방의 물건들이었다. 


 우린 최대한 세입자가 돈을 받아서 나갈 수 있는 물건에만 입찰을 했다. 그 사람은 출근을 해야 하니 법원에 가서 입찰표를 쓰고 입찰을 하는 것은 내 역할이었다. 처음에는 덜덜 떨면서 쓰던 억 단위의 돈이 나중엔 그저 숫자로 밖에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쓴 고배 끝에 드디어 낙찰을 받았다. 


 하지만 낙찰을 받기 위해 너무 높게 쓴 가격 때문에 난 경매장에서 야유를 받았고 얼굴이 빨개진 채 낙찰 표를 받아서 돌아왔다. 그렇게 받은 낙찰받은 집들은 썩은 집들이 많았다. 그러니 매매도 안 되고 경매로 나왔겠지만... 그 집들을 리모델링해서 다시 새 집처럼 날개를 달아 세를 놓았다. 


 낙찰을 받고 명도 소송을 하고 법원을 들락날락거리고 부동산에 시세조사를 하고 그 사람에게 보고를 하고 완전한 시스템이었다. 그 사람은 주로 자금과 세금 관련 일을 했고 나의 보고를 받고는 일의 진행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상관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그때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구체적인 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부동산 공부도 하고 수업도 듣고 나는 인테리어에 다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말 곰팡이와 낡아빠진 벽지로 버려진 집이 새로운 생명을 얻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그 집에 들어가 사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불만이 있는 부분도 있었다. 한 번은 춘천의 집을 낙찰받기 위해 몇 번을 춘천에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는지 모른다. 세입자의 요구와 어려운 명도 서류를 작성하는 것 등 온갖 일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대출을 이유로 모든 집은 그 사람의 명의로 되어있었다.


 그때는 전혀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그런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혼 때도 큰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자금의 한계를 느낀 우리는 결국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바로 친정어머니께 친정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이다.


 나는 절대 안 된다고 안 된다고 했지만 그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자기가 장모님께 직접 말하겠다면서 우리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 결국 설득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들 같은 사위와 철없는 막내의 간곡한 부탁에 언니들 몰래 1억 좀 넘은 돈을 대출해 주셨다. 언니들이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그동안 언니들이 대출을 받아달라고 해도 어머니는 절대 대출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특혜를 입은 우리였다. 


 그 돈으로 우린 좀 더 부동산 투자를 했고 그 사람은 "나중에 친정에 아파트 한 채씩 드리자."라는 말도 했었다. 그때는 그랬다. 적어도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 속 빈 말이었음을. 이혼할 때 많지도 않은 집이지만 하나라도 더 주기 싫어서 바르르 떨던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아무튼 1년만 빌리겠다는 어머니의 담보대출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물론 이자랑 원금은 갚아 나가고 있었지만 평생 빚이나 대출 없이 살아오신 어머니는 조금은-사실 많이- 찜찜하셨는지 넌지시 언제쯤 갚을 수 있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하지만 임대사업자로 묶인 물건들이 많아 매매가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1년 후에 어머니의 대출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사람은 어머니의 대출뿐 아니라 다른 대출이나 마이너스 통장 등 남의 돈 쓰는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어머니는 점점 돈을 제 때 못 갚으면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나에게 채근하셨고 나는 중간에서 아주 난감했다. 거기다 정말 어머니 집을 담보 대출받은 걸 언니들한테 걸리는 날엔 난 의절당하고 다신 친정에 발도 못 붙일 지경이라 혼자서 속이 타고 썩었다.


 처음에는 우리 자금인 3000만 원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그 사람의 욕심과 욕망은 끝이 없었다. 돈이 있으면 누가 부자가 못 될까. 돈이 없으니 그 돈으로 아등바등 살고 그 안에서 투자를 하는 것이지. 하지만 나중에 이혼할 때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죽을 동 살 동 해서 이만큼 만들어 놓으니 아무것도 안 한 내가 가져가려고 한다고. 


 지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이 진심인 건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다. 정말 사장님처럼 자기는 회사에 다니고 자금에 대한 것만 맡고 내가 온갖 시세 조사와 임차인 조사 등등을 해서 정리해서 갖다 바치면 검토해서 진행하고... 인테리어 하는데 하루 종일 신경 쓰고 그걸 홍보하기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 피터*이나 직*같은 곳에 올리고 세입자 컨텍하고 나도 많은 일을 했는데 그 사람은 그런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나 보다.


 우리 어머니의 마음고생, 나의 마음고생 그런 것 역시 그 사람에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혼하면서도 결국 우리 어머니의 대출은 내가 가져왔다. 대출을 갚는 게 늦어지면 이러이러해서 늦어진다, 장모님께 죄송하다고 전화통화라도 한 번만 해달라고 그렇게 몇 번을 말하고 또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빌릴 때는 자기가 자진해서 얼른 전화하더니 내 간곡한 부탁에도 '언제 갚을지 계획 중이야, 생각이 정리되면 전화드릴게.'이런 말로 이혼할 때까지, 이혼한 후에도 결국 우리 어머니께 전화한 통 없었다. 결국 우리 어머니는 왜 그 대출까지 네가 떠안았냐고 화병이 나셨고 그걸 보는 내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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