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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욱 Jun 03. 2019

 '욕망의 평등'을 위하여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2019), 푸른숲.  


- 장애를 가졌음에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장애인이 있다.


  여기 한 사람의 장애인이 있다. 그는 소규모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형 휠체어에 누워 생활하는 중증 장애인이다. 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힘겹게 천천히 입을 떼어 몇 마디 말을 하거나,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 가며 몇 평 남짓한 방의 이곳저곳을 몇 번이고 살피는 것뿐이며,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한 달에 한두 번 시설을 방문하는 봉사자들이 유일하다. 좁은 방 안과 작은 침대, 그가 누릴 수 있는 세계의 전부인 것이다.

 

“인공호흡기 때문에 24시간 보호 필요한 근육장애인”, 한겨레, 2018. 7.5. 기사에서 사진 발췌.

  이러한 모습은 어느 한 사람을 특정 짓지 않더라도 우리가 '중증 장애인'을 언뜻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서 흔히 그리게 되는 영상과도 같은 것이다. 흔히 TV나 신문에서 접하게 되는 시설 속 장애인의 모습이 이러한데, 그것들은 대개 '희망' 또는 '감동', 따위의 수식어들과 함께 TV 화면과 신문 지면을 채우게 되는데, 이 감동적인 영상과 기사는 장애인 본인의 다음과 같은 멘트와 함께 완성된다.

 
 "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들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순 없지만, 대신 창 밖으로 저의 눈을 돌려 바깥의 풍경과 마주할 수는 있습니다. 봄이면 창밖으로 보이는 봄꽃들, 한겨울 눈이 오는 날이면 하늘을 채우는 하얀 눈송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아름답고 또 즐겁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번 나를 찾아와 주는 봉사자 분들의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그들이 가져다주는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비록 저의 몸은 이 곳에 있지만, 마음만은 마치 바깥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해 주니까요.  저는 여러분과 다르지만 제 스스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다소 전형적이지만 '감동'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듯 보이는 이 영상들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 아름답다고, 저 사람에 비하면 훨씬 더 건강한 몸을 가졌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며  자신의 처지를 불평했던 내가 부끄럽다고, 저렇게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며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본받아야겠다며, 이것이야말로 소위 '소확행'이 아니겠느냐며 저마다 한두 줄의 감상평을 댓글로 남기며 이 영상이 준 감동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비한다.  영상 속 주인공은 어느새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이콘' 쯤이 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 무엇이 '희망'이며 '욕망'인가. '욕망의 불평등'에 대하여.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욕하는 성자나 초연한 철인(哲人)은 완성된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소수는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마도 지겨워서 죽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제3장 「나는 그렇게 믿는다」 중에서.


  사실 (주로 종교적 관점에서) 흔히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 이외에 다른 욕망을 품는 것은 어떤 개인의 마음속에 쓸데없는 일렁임을 만들어 어떠한 목표를 이루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하나의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를 계속해서 욕망한다는 것은 상당히 탐욕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때로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만약 이에 반발하여 어떤 개인이 '욕망하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은 채 욕망의 끝으로 달려가더라도, 결국 그를 기다리는 것은 상당한 허무감, 심지어는 극도의 좌절감뿐임을 누군가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욕망하지 않으며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그리하여 '욕망'이 가져올 허무와 좌절을 피해 가는 삶이다. 마치 침대형 휠체어에 누워 창밖의 봄꽃과 하얀 눈송이에 만족하며 산다던, 어느 한 장애인의 '감동적'인 삶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소 도발적이게도,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러셀의 말처럼 우리 대부분은 금욕주의자나 모든 것에 초연한 철인이 아니거니와, '욕망'이 가져올 좌절과 허무가 두려워 무언가를 욕망하기를 그만두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재미없어져 버릴 것-때로는 재미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다시 TV 속 '감동적인 장애인'에게로 돌아가 조금은 도발적인 상상을 한번 해 보자. 앞의 시설 속 장애인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앞서 '감동적인' 영상에 열렬히 댓글을 달며 응원을 보내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저는 소규모 장애인 시설에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장애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은 매우 무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욕구불만의 연속입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침대에 누워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고, 가끔씩 눈을 깜빡이는 것뿐입니다.
   이상한 생각 같기도 하지만, 저도 제 또래의 대학생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고, 직장에서 내가 바라는 일을 하며 온전히 저의 힘으로 돈을 벌어 보고도 싶으며,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름답고 매력 있는 이성과 연애, 아니 섹스도 해 보고 싶습니다."


  어느 한 장애인의 위와 같은 고백에 사람들이 보일 '1차 반응'은 아마도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장애인에 대한 동정의 눈물일 것이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얼마나 답답할까', '세상에 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저 사람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우리가 건강한 몸을 가졌음에 감사하며 살자' 등등일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장애인의 고백에 대하여 사람들이 내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무료한 후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고자 클릭한 인터넷 기사에서 한두 줄의 동정 어린 댓글을 쓰는 데 걸리는 잠깐의 시간 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 - 버스를 타자!> (2002), 스틸컷.  

  만약 이 장애인의 고백이 단순한 고백과 하소연의 차원을 넘어, 어떤 적극적인 차원의 요구-때로는 투쟁-으로 발전한다면 이러한 '잠깐의 동정'은 장애인을 향한 '손가락질'로 변한다. '네 주제에 배워서 어디 쓸 데가 있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바라고, '자기 몸도 불편한 주제에'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일을 하려고 하며, '네 몸도 못 가누면서' 이성과의 섹스를 꿈꾸다니!  앞서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며 '감동'을 만들어 내던 그는, 어느새 학교와 직장과 섹스를  '욕망'하는 주제넘은 장애인이 되고 만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은 그저 소소한 '희망'일 수는 없는 것일까? 비장애인들에게는 자연스레, 또는 자연스럽진 않더라도 비교적 쉽게 주어지는 것들조차도 우리는 이토록 '욕망'해야만 하는가? 심지어는 그런 것들을 꿈꾸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이 책 <희망 대신 욕망>은 이러한 '욕망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의식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2017년 서울 강서구 공립 특수학교  신설 토론회에서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학부모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도 말했지만 어떤 개인의 욕망은 상당한 수준의 허무와 좌절감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 허무와 좌절감은 장애인의 경우 훨씬 더 심한데, 비장애인들이 자연스레 얻는 것들 - 예컨대 의무교육-마저 우리에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이러한 자각은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신체에 더하여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욕망의 불평등'을 깨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예컨대 장애인 교육권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는 점진적으로나마 '교육받는 장애인'의 비율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장애인도 버스 타고 싶다'라는 구호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저상버스 도입이라는 결과물을 이끌어 냈다. 그들이라고 하여 후에 찾아올지도 모를 좌절과 허무가 두렵지 않았겠냐마는 그것을 넘어서는 그들의 욕망(책의 저자 김원영은 이를 일종의 '분노'로 칭했다)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조심스러운 고백이지만 이 문제에 있어 나는 철저하게 관조적 자세를 취했다. 아니 어쩌면 분노로 가득 찬 그들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저들과 나는 달라', '나는 아쉬운 것이 없잖아'라는 내 마음속 어딘가의 속삭임을 따라 그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는지 모른다. 그들을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곤 그저 가끔씩 내 방에 혼자 앉아 진심일지도 모를 분노를 몇 명 보지도 않을 글 속에 이렇게 담아내는 것뿐이다.

  

  함께 하지 못함이 부끄럽지만 나는 그들을 응원한다. 그들의 욕망, 그들의 외침, 그들의 분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얻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이들로부터 손가락질받지 않는 '욕망의 평등'을 언젠가는 가져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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