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여행도 그렇다. 세낭크 수도원에서 기대했던 라벤더를 보지 못한 나의 여행 파트너, 딸은 기대만큼 실망도 컸다. 봄이 유난히 추워 개화시기가 늦어졌다고 들었으나 위로가 되지 못했다. 조금 더 지나고 올 것을. 2주만 지나고 올 걸 하고 후회도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행 마지막 날, 딸과 나는 라벤더만큼 소중한 것으로 보상받았다. 기대하지 않았으나.
그것도 인생이고 여행인 듯!
멋진 고흐드의 아침, '독수리 둥지'라는 마을에서 커피를 마시며 지도를 보고 오늘의 일정을 바꾸었다.
라벤더 보라색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발랑솔 (Valensole) 지역을 포기하고
1) 프랑스인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마을 '무스티에 생트 마리 (Moustiers-Sainte-Marie)'에 들러보고
2) 유럽의 그랜드 캐니언, 베르동 협곡을 달린다.
3) 니스로 돌아간다.
고흐드에서 '무스티에 생트 마리'까지는 2시간, 시골길을 달렸다. 우리나라 항공사 광고로 더 유명해진 마을답게 마을 공용주차장에 자리가 없어 헤매다 마을 끄트머리에 주차를 하고. 주차권 발권 기계( Castellane)에서 1시간 30분 티켓을 끊었다. 남프랑스에서 공용주차장에 주차할 때, 대부분 주차요금을 미리 계산하고 기계에서 티켓을 출력해 자동차 앞에 잘 보이도록 놓아야 한다. 티켓에 명시된 주차 종료시간을 넘기면 단속원이 남기는 딱지를 선물로 받아야 한다. 나는 이 마을을 상징하는, 마을과 마을 사이의 별을 보고 십자군 때 무사귀환을 감사하며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했다는 성당만 보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산악마을이다. 마을 전설의 성당(Chapelle Notre Dame de Beauvoir)은 높은 바위산 중턱에 있고 끝없이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고 올라야 했다. 돌계단 양 옆으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14처를 지나 선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별을 보고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성당 입구, 성녀상을 지나 문을 통과하니 다시 돌계단이 나오고 드디어 세 그루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전설의 성당을 마주했다. 작고 소박한 성당이다. 성당 출입문 위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햇빛에 반짝이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지나온 십자가의 길이 까마득히 보인다. 마을 붉은 지붕, 멀리 베르동 협곡과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Chapelle Notre Dame de Beauvoir 올라가는 돌길 / 작은 성당
숨을 고르고 마을을 내려다보니, 내려갈 길은 까마득한데 주차 종료시간은 30분도 남지 않았다. 프랑스 여행 중 처음으로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은 딸은 나와 가파른 돌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차요금을 아끼려고 했다가 시골마을에서 계단 마라톤을 뛰었다. 겨우 주차장을 향해 돌진하는데 치즈와 와인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5분을 남기고. 딸과 나는 작고 예쁜 가게로 들어가 눈에 띄는 치즈 두 덩어리와 살라미를 집어 들고 계산을 하고 다시 뛰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무스티에 생트 마리에서 베르동 협곡의 전망대 'Belvedere de Trescaire bas' 까지는 50분쯤 걸린다. 베르동 협곡의 길을 시작하기 전 계단 마라톤을 뛰느라 고생한 우리는 협곡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차가 쌩쌩 지나가는 레스토랑 문 앞의 테이블에 앉아 나는 바질 페스토 뇨끼를, 딸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Resto de la Place)
초록색 바질 페스토 뇨끼를 보고 많은 양에 놀랐고 맛에 다시 놀랐다. 우리나라 유명 맛집에서 주문하는 뇨끼는 접시에 10개를 넘기기 어렵다. 아무리 맛있는 뇨끼를 먹어도 언제나 부족했다. 뇨끼를 먹고 나와 한 시간 후에 쌀국수 한 그릇을 먹은 기억도 있다. 프랑스의 시골 인심은 넉넉하다.
베르동 협곡, 전망대 'Belvedere de Trescaire bas'로 가는 길은 웅장하고 장엄한 협곡을 따라 정상을 향해 오른다. 하늘 끝 전망대 위에서 양팔을 펼치면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가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가는 길은 환상이었다. 그러나 가드레일도 없는 좁은 길을 가파르게 오르며 창밖으로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 보이자 높이 오를수록 행복하다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심장이 떨렸다. D952길을 달리며 협곡의 한가운데 들어섰다. 1억 4000만 년의 시간이 찰나의 순간으로 다가왔다.
(베르동 협곡, Trescaire 전망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협곡을 내려와 생트 크루아 'Lac de Sainte-Croix) 호수로 갔다. 비현실적인 에메랄드 물 위로 보석이 반짝였다. 보트를 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비현실의 세계에서 니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니스로 돌아가는 길에 두 곳의 와이너리에 들렀다. 딸은 '샤토 라코스테'의 야외 테라스에서 맛 본 와인을 잊을 수 없다며 '무스티에 생트 마리'에서 어렵게 획득한 치즈와 살라미를 와인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신의 물방울'에 등장하는 멋진 포도밭을 지나 'Chateau ~ ' 표시가 보였다. 입구 가게에 들어서니 몇몇 사람들이 와인 시음을 하고 있었고 기분 좋게 와인을 맛보던 딸은 얼굴을 붉히며 나가자고 했다. 와인을 따라주는 점원이 딸의 와인잔을 바꿔주지 않고 레드를 마신 잔에 화이트를 따라주며 네가 와인 맛을 알까 하는 비웃음을 날렸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번 와인잔을 바꾸어 주며 친절했는데.
다시 D54 도로를 내려오다 'Chateau Font Du Broc' 와이너리에 들렀다. 평화로운 포도밭, 멋진 가게, 친절한 직원. 딸은 가격도 착하고 맛도 훌륭한 와인을 골랐다.
2시간 20분을 달려 니스 역에 도착, 차를 반납하고 짐을 끌고 숙소로 가는 길에 저녁노을이 도시를 감쌌다.
숙소에서 바게트 빵, 착한 와인과 치즈 두 덩어리, 살라미를 풀어놓았다. 최고의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에필로그
꿈이었을까.... 독수리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 파란 하늘 끝에서 별을 보았다. 무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