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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때로 Sep 27. 2021

쌀밥에 김 그리고 멸치

비상식량 삼총사

2009년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전 날, 내 가방엔 멸치볶음과 김 한 묶음이 들어갔다. 

"이건 마른반찬이니까 오래갈 거야." 

"아니,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걱정 마!"

나는 타지에서 딸이 굶을까 봐 걱정하는 엄마 마음이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해결방법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그렇게 비행기는 떠나고 인천, 이스탄불, 빈(Wien)... 기숙사에 도착한 나의 첫 끼니는...



 밥, 김, 멸치였다. 

아니,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도.. 엄마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생필품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식기류는 어디서 사야 하는지, 먼 동쪽나라에서 온 내가 유럽 한가운데서 살림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는 큰 에너지가 필요했다. '간단하게 사 먹지 뭐'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어디서 뭘 사 먹는 것도 또 하나의 넘어야 할 벽이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그렇게 3일 동안 밥, 김, 멸치, 이 비상식량의 힘으로 나는 첫 외국생활을 시작해나갔다. 오늘은 이거 먹고 동네를 돌아보자. 오늘은 은행을 가보자. 오늘은 교통카드를 만들어보자.. 빈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멸치와 김은 내 든든한 조력자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밥 먹는 속도가 느린 첫째.

 ".. 맛없어?" 

 하고 되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역시..' 실은 알고 있었다. 오늘 저녁밥은 망쳤다는 걸.

 볶음밥이라기엔 질감도 질퍽했고, 어쩐지 이상한 어묵탕 냄새가 났다. 

 "그래도 먹어봐."

하고 한 숟갈 먹이니 세상에.. 아이가 밥을 입에 물고 헛구역질을 한다. 뱉어 뱉어. 엄마가 잘못했다 야. 이제껏 누가 내 요리를 게워낸 적은 없었는데.. 한동안 잠잠했던 나의 요리 똥 손이 실력을 발휘했구나.


 얼른 찬장으로 달려가 김을 꺼낸다. 멸치볶음도. 밥과 멸치와 김. 

너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굶을 뻔(?)했잖니. 멸치볶음은..


 멸치를 에어프라이어에서 180도로 5분 동안 구워준다. 바삭하게 구워진 멸치를 체에 쏟고 탁탁 쳐서,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고 멸치를 볶아준다. 버터의 카제인 성분이 멸치의 비린내를 잡아준다. 지글지글… 버터와 멸치가 잘 볶아지면 꿀(올리고당)을 한 바퀴 둘러준다. 단짠 멸치볶음 완성!


 김은? 딩동댕~ 마트에서 사 온다! 물론 직접 김에 기름바르고, 굽고, 소금뿌리면 훨씬 맛있다. 가끔 아버님이 직접 만드신 조미김을 가져오시면 그 향과 맛이 얼마나 폭발적이던지! 사먹는 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있으나.. 우리 비상식량 파트 김 씨는 오랫동안 찬장에서 대기해야하는 대기조이므로 마트출신이 당연하다.


 달콤한 멸치볶음과 짭짤한 김을 번갈아 먹으니 밥그릇이 어느새 뚝딱 비워졌다. 손가락에 묻은 밥풀을 훑어먹으며 "엄마 밥 또 주세요." 하는 녀석. 반 그릇 더 리필(?)해주니, 이번에는 김이 부족하다. 김도 리필, 멸치도 리필.  마지막은 밥 없이 과자처럼. "밥이랑 같이 먹어야지" 잔소리를 하려다가, 또 밥만 리필해서 과식할까 걱정해 그만두었다. 대신 "물마셔~" 로 마무리.

 아이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도 좋지만, 배부르게 먹어서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정서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난 아이가 컨디션이 떨어져서 짜증내는 기색이 보이면 다소 편식을 하더라도 배불리 먹인다. 경험상, 이렇게 먹이면 그 다음 끼니는 골고루 잘 먹었다. 특히 밥태기 때 (아이들이 밥을 잘 안 먹는 시기를 밥+권태기 라고 해서 이른바, 밥태기라고 한다) 빵이든 새우튀김이든 한 끼 배불리 먹여보자. 아이의 짜증도 줄고,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줄어들 것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랄까. 호흡을 조금만 길게 쉬어본다. 멸치와 김만 먹으면 어떠리. 아이들은 다음 식사 때, 버섯볶음과 소고기를 구워 먹을 것이다. 이런 철학 덕에 사실 다른 사람에게는 '무신경한 엄마'로 보여서 뒤통수가 따갑기도 하다. 그 사람들은 순간을 보고, 나는 시간의 흐름을 보니 어쩔 수 없다. 신경쓰지 말자. 보잘것없지만 이렇게 한 끼니를 든든하게 먹이면 아이들은  든든하게 채운 배를 무게 중심 잡아 클 것이니.. 지금은 소꿉놀이를 하고, 저녁엔 미끄럼틀을 타고, 밤엔 책을 읽으며..


 이렇게 쓰니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을 알아냈다. 멸치와 김은 몸과 마음이 든든해지는 비상식량이라는 것. 그러니 오늘도 찬장을 채우고, 멸치를 볶아야 겠다. 


버터로 멸치 볶는 팁: 유튜버 happycooking120180 님의 레시피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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