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맛에 감칠맛을..
마트에서 콩나물 한 봉지를 손에 들고 4D 상상을 해본다. 콩나물 무침? 콩나물 국? 라면에 올려먹어? 이 때 갑자기 냉장고에 꽁꽁 얼려있는 오징어 한 마리가 떠오른다. 그래, 콩나물국밥!
콩나물 요리라고는 콩나물 무침과 콩나물 국 밖에 모르던 내가 콩나물국밥을 할 줄 알게 된 건 오징어 때문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남는 오징어 다리를 콩나물 국에 넣어 본 것이다. 오징어 다리만 넣었을 뿐인데 평범하던 국물맛이 확 살아나는게 아닌가? 콩나물과 오징어는 천생연분이었다. 지갑이 두둑한 날이면 거기에 김이랑 살짝만 익힌 달걀도 같이 먹는 거지.
집으로 돌아와 콩나물 봉지를 뜯고 스텐볼에 쏟는다. 콩나물 샤워 시작. 콩나물 머리에 있는 모자가 살살 벗겨진다. 모자는 그대로 물에 흘러 보내고 새 물로 두어번 더 씻는다. 깨끗해보이지만, 콩나물은 축축한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미생물이 많다. 샤워가 끝나면 체에 받쳐 물기를 빼준다. 그리고 냄비에 깨끗한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를 켠다. 아차차, 냉동 오징어를 미리 꺼내 놓았어야 하는데.. 오징어는 살짝 녹아야 썰기 좋다. 깡깡한 오징어를 비닐에 봉한 채로 찬 물에 담근다.
가스 불을 잠깐 끄고 오징어가 녹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마늘을 다져도 좋고, 식탁을 닦아도 좋다. 소파에 잠시 앉아 휴대폰으로 재미있는 동영상을 보아도 금방이다. 오징어가 녹은 걸 확인하고 다시 가스불을 켠다.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동안, 비닐에서 살짝 녹은 오징어를 꺼내 물로 헹군다. 손질된 오징어를 샀지만 빨판과 가운데 뼈는 조금씩 남아있다. 불순물들을 씻어주고 잘게 썰어준다.
팔팔 끓는 물에 콩나물 한 줌과 오징어를 넣는다. 육수 재료도 넣는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다시마와 표고버섯이 육수 주인공이다. 다시마에는 글루탐산나트륨이, 표고버섯에는 구아닐산이 풍부해서 서로 다른 감칠맛을 낸다. 하지만 냉장고 사정에 따라 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된다. 사실 귀찮아서 안 넣기도 한다. 왜냐하면 오징어에 있는 베타인이라는 성분이 또 기가 막힌 감칠맛을 내기 때문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나중에 뿌려먹을 김에도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이 풍부하다. 이제보니 콩나물국밥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음식이다. 감칠맛(베타인)에 감칠맛(글루탐산)을 뿌려먹는 음식이라니.
콩나물이 익으면서 비린내가 날 수 있으므로 냄비 뚜껑은 계속 열어둔다. 소금과 다진마늘로 간을 해준다. 드세던 콩나물이 기가 죽고 오징어가 핑크색으로 변하면 국물 맛을 본다. 맛있게 우러났다면 파를 송송 썰어 넣어준다.
큰 냄비 그릇은 어른들용. 국 그릇은 어린이용이다. 건더기인 콩나물과 오징어를 잘 나누어 담고, 국물을 붓는다. 아직 두 돌이 안 된 둘째의 그릇에는 물을 조금 넣어서 싱겁게 해준다. 콩나물이 너무 길면 아이들 목에 걸리므로 아이들 그릇에는 가위질을 서너번 해준다. 길게 길게 뻗은 콩나물은 좀 더 큰 뒤에 즐기자꾸나.
평소엔 누워서 휴대폰만 하던 남편이지만 이쯤되면 신기하게도 스스로 일어난다. 콩나물국밥의 마법이랄까. 알아서 펜트리에서 김을 꺼내고 정성껏 부순다. 부순 김을 네 그릇에 소중하게 분배할 동안, 나는 후라이팬을 달궈서 달걀후라이를 한다. 달걀 노른자가 말랑말랑 터질듯 말듯하다. 절반은 꼭 실패하는 써니사이드업 (Sunny side up) 이지만 상관없다. 남편과 아이들은 이미 콩나물국에 밥은 말았고, 달걀은 거들뿐. 감칠맛은 입에서 코로 가득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