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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지니 Dec 26. 2023

캐나다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출산하기

출산 예정일까지 아직 한 달 반이 넘게 남아있었는데 그날 막내가 나올 것을 알았다면 첫째와 둘째 출산 때처럼 삼겹살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


우리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곳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는데 돈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아침부터 한바탕 울음을 쏟아낸 나의 기분을 바꿔주기 위해 남편이 선택한 곳이었다.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하루를 보냈고 저녁에는 집 앞 공원에 나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산책도 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썰어 두었던 수박을 먹었는데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남편과 나란히 앉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수박을 먹은 뒤 남편은 작업실로 내려갔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IELTS 시험 준비를 위해 아이들이 잠든 옆방으로 갔다.


한참 공부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는데 내 다리를 타고 뜨뜻한 액체가 흘러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첫째와 둘째 모두 출산 예정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유도분만을 했기 때문에 양수가 터진 적은 없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양수가 터졌나 보다 생각했다.


액체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화장실로 이동하며 큰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잠든 아이들을 깨워 옷을 입히고 다 함께 병원으로 갔다. 얼마 전 아들이 팔 부상으로 찾았던 응급실에 이번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아들의 부러진 팔은 응급치료에서 순서가 앞당겨졌지만 양수가 터진 것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양수가 멈추지 않는다고 아무리 말해도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었다. 나는 밤 11시 50분에 병실에 입원했고 10분의 차이로 하루치의 병원비를 더 내야 했는데 고작 100만 원 가지고 연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까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기다림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병실에 누워 하염없이 기다렸다. 중간에 간호사가 몇 번 왔다 가긴 했지만 다른 환자가 있으니 좀 더 기다리라는 말만 전해주고 가버렸다.


내 차례는 계속 늦춰지다가 결국 오전 9시가 다되어 첫 검사를 했다. 나는 자정부터 그때까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양수가 터진 지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났고 세균이라도 감염되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까봐 너무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내가 MSP가 없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태연하게 아기의 머리가 거꾸로 있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왕절개 수술을 하면 자연분만보다 훨씬 높은 비용이 청구될 것이었다.


아이들을 지인 집에 맡기고 남편과 나 둘만 남았다. 누군가를 기약 없이 기다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병원에서 의사를 기다리는 것이 그렇다. 일방적인 기다림은 곧 올 거라는 희망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데 그게 아기가 나오려고 하거나 하루치 병원비가 조금 있으면 또 추가될 상황에 놓였다면 그 사람에게 1분은 1시간과도 같다.


나는 병원에 입원한 지 16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수술 준비에 들어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어도 타국에서 출산은 마치 첫째 출산과 같은 막연한 공포로 다가왔다. 수술 준비를 마치고 내가 누워있는 침대가 수술실로 옮겨질 때까지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는데 그 손을 놓게 되는 순간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수술로 그동안 나를 진료했던 인도의사는 그 자리에 없었고 대신 중국인 의사가 수술을 맡게 되었다. 나중에 아기와 함께 인도의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었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잘 울지 않는다. 때때로 울고 싶은 심정에 사로 잡히기도 하고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유나 상황은 제각각 일지라도 만약 누군가에게 잘하지 못한 서러움이나 사무침 때문에 운다면 보통은 그 사람이 멀리 떠나거나 더 이상 만나지 못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좀 달랐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나는 오로지 한 사람만 생각하며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바로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눈물이 흘러내린다면 그 이유를 한 번쯤 생각해 봐야겠지만 내게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이미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있었는데 그간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대한 원인을 남편 탓으로 돌리고 있는 나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내가 잘하고 고생한 것은 굉장히 크게 생각하면서 남편의 노력에 대해서는 인정보다 더 잘하지 못한 점만 부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남편이 초록 가운과 두건을 쓰고 수술실로 들어왔다. 의사의 지시대로 탯줄을 자른 남편은 너무 일찍 세상에 태어나 작고 가녀린 아기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생명의 탄생은 분명 축복이다.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의 본성과는 다른 행동을 일삼아 온 사람이 본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 또한 큰 축복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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