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한 도시에 얼마 전 산불이 나서 남한만큼의 면적이 타 들어갔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캐나다는 워낙 땅이 넓다 보니 같은 BC주라고 해도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꽤나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곳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며칠 뒤부터 하늘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바깥은 타는 냄새로 가득 차 도저히 외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매년 이맘때 발생하는 산불은 처음에는 작은 불씨였는지 몰라도 점점 퍼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도시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아마 누군가 “너에게도 그런 힘이 있어.”라고 한다면 그저 동기부여 차원에서 힘을 주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외부로 드러난 육체적인 힘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안에 잠재된 내면의 힘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내 안에 초인적인 힘이 어떻게 물리적 사건을 만들어 내는지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밴쿠버에서 지낸 시간만큼 내 배에도 제법 임신한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았는데 임신 후기에 접어들면서 출산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받게 되었다.
인도계 여자 의사가 내 담당의였는데 처음에는 강한 어조의 말투 때문에 잔뜩 주눅이 들었으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이해하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가고 편안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출산을 2달가량 남겨두었을 때 의사는 아기 머리가 나의 가슴 쪽을 향해 있으나 출산할 때쯤 되면 대부분 머리의 방향을 아래쪽으로 바꾸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자고 하였다.
첫째와 둘째를 임신했을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고 출산시점에 별문제 없이 자연분만을 하였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외국인 신분이었고 비용이 또 추가될까 봐 의사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도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출산일이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갈지 캐나다에 남을지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캐나다를 떠나기 싫어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부부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 반면 이곳 에서의 미래는 불확실하여 결정을 주저하게 되었다.
나는 또다시 안정과 도전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어느 날은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기로 했지만 또 다른 날은 곧 막내 출산인데 무슨 무책임한 행동이냐며 나를 다그쳤다.
그동안 나는 철저히 계획적으로 살아왔고 그 계획이 틀어질까 봐 혹시 모르는 상황까지 대비했었다. 그랬던 내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고,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얼마나 마음이 조급하고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찼을지 나는 알고 있다.
평소 싸울 일이 전혀 없던 우리 부부가 캐나다에 와서 몇 번의 다툼이 있었는데 모두 나의 불안함에서 나온 일방적인 화풀이였다.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 여전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남편은 임신한 나를 아무 말없이 온전히 보듬어주었다. 아내는 임신했을 때 남편이 해준 것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의 고마움을 결코 잊지 못한다.
걱정과 두려움의 감정상태는 그 어떤 것보다 파괴적이고 강력하다. 사랑과 감사의 상태가 잔잔한 호수와 같다면 걱정과 두려움의 상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거센 파도와 같다.
걱정과 두려움이 처음에는 작은 파도 같을지라도 그 단계에서 감정의 방향을 바꾸지 못하면 부정적 방향으로 키워진 허상의 세계는 어느 순간 실제처럼 느껴지고 그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이 느껴진다. 생각은 되풀이될수록 커지고 감정은 되풀이될수록 요동친다.
끌어당김이 생각과 내면의 감정을 반영한다면 그러한 상태를 외부에 만들어내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된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격렬해지는 것은 쉽지 않아도 걱정과 두려움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걱정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나의 감정상태는 그것을 외부에 표출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일 때의 끌어당김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강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