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건물과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에 살다 보면 눈에 보이는 계절의 변화보다 체감상 느껴지는 계절의 변화에 더 민감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에 오니 계절의 변화가 눈에 굉장히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밴쿠버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하게 된 겨울의 모습은 내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초록빛 가득한 밴쿠버를 머릿속에 그리며 이곳에 왔지만 겨울잠 자는 자연의 모습은 스산하고 황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살 때도 벚꽃이나 단풍축제 같이 한껏 뽐낸 자연의 모습을 찾아다니긴 했어도 벌거숭이 자연에는 눈길조차 준 적 없었는데 우리 가족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더불어 살아가는 게 어떤 모습이 될지 결코 알지 못했다.
밴쿠버 생활 초반에는 영주권 준비를 비롯하여 세입자와의 문제, 아들의 팔 부상 등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고 또 한편으로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느라 반년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 버렸다.
그러던 중 밴쿠버에서의 첫여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그림 같았고 나는 그 속에 있는 것이 마치 꿈만 같이 느껴졌다.
회사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내 가슴 한편에는 자연 속 한적한 곳에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당시는 그 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로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느린 삶에 대한 동경,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날카롭고 예민하게 느껴졌는데 순박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가평에 토지를 매입한 것은 노후에 그곳에 집을 짓고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꿈이 한몫했었다.
그 땅은 뒤에는 산이 있고 앞쪽으로 강이 흐르는 멋진 곳이었다. 땅을 사놓고도 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바빠서 몇 번 내려가보지 못했는데 캐나다에 가기로 결정한 뒤 부동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결국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었다.
나의 자연에 대한 로망은 조용히 사라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언제나 나의 가슴 깊은 욕망과 맞닿아 있는 듯 나를 자연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어주었다.
밴쿠버는 자연이 잘 보존되고 곳곳에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오래된 고목 사이를 거닐고 여러 동식물을 탐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동안 미리 날짜를 정해 놓고 휴가를 떠났던 것과는 달리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떠났는데 이곳에 온 뒤 거대한 숲, 산과 강을 시도 때도 없이 놀러 가면서 아이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노는 것에 더 익숙해져 갔다.
반 시간 거리에 있는 주립공원은 우리 가족이 자주 찾던 곳인데 그곳에 들어가면 전화와 인터넷이 터지지 않아 자연스레 자연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고 또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눈길이 흘렀다. 거대한 숲으로 둘러싸인 파란 호수에는 거위 떼가 유유히 지나가고 카약을 타는 사람들과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였다.
밴쿠버의 여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 완전히 머무르지 못했고 유유자적한 이곳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분리감이 존재했다. 이 삶은 잠시 스쳐가는 경험으로만 느껴질 뿐 내 마음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출산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영주권은 내가 영어점수를 제출한다 해도 제대로 나올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으로 귀국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1년이라는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자 내면의 불안함은 점점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끝자락, 밴쿠버의 자연은 내게 들이닥칠 태풍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을 내게 선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