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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11. 2024

허우적거리기를 멈추고 흘러가는 중입니다.

To. 밀라노


작가님, 오늘 대구는 낮 최고 기온이 33도였답니다. 지난 편지까지만 하더라도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걷기 좋은 날씨라고 썼었는데, 채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폭염이 시작되었어요.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간(밤 10시)에도 여전히 ‘덥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이제는 열대야도 시작인가 봅니다. 예전에는 계절의 변화를 서서히 느끼며 몸이 적응할 시간이 있었는데, 근래에는 금방 추웠다가 금방 더웠다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날씨 때문에 몸이 더 적응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아무튼,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의 둘째 주에 두 번째 편지를 씁니다.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우울의 바다에서 음파, 음파, 호흡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어요. 작가님 말씀처럼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을 쓸 때만 하더라도 저에게 유일한 호흡은 글쓰기가 분명했지요. 다른 대체제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저는 글쓰기로 숨 쉬고 글쓰기로 도피하고 글쓰기로 생을 확인했어요. 그때는 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글쓰기는 저를 살렸습니다. 덕분에 매년 책을 쓸 수 있는 엄청난 호사도 누리게 되었지요.


지금은, 글쓰기가 그때만큼의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우울감을 겪으며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토로하기도 하는데요. 확실히 <쓰다 보면>을 쓸 때처럼 그런 글들을 공개된 곳에 쓰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졌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육아로 인한 우울, 경력 단절로 인한 불안 등을 거의 매일 브런치에 써서 올렸고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며 나아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러면서 글쓰기에 푹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작가님 말씀처럼 제 글이 ‘공해’가 될 것 같아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동안 브런치를 멀리했던 것 같아요. (공개된 곳에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고 쓰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요즘 제가 빠져 있는 일은 걷기입니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꼭 걸으려고 해요. 일주일 중 유일하게 육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원고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일요일,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한 시간 이상을 걷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더우나, 추우나, 날씨에 상관없이요. 우울감이 밀려오던 초기에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들어서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했었는데, 자꾸 걷다 보니 걷는 일 자체가 참 좋더라고요. 몸에 좋은 건 둘째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가득 담아 이어폰 가득 울리게 들으며, 걷고 또 걷다 보면 복잡한 생각의 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 듭니다. 실상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더라도, 걷는 동안만큼은 모든 게 나아질 것 같은 희망이 들어요.


제가 사는 동네에는 숲과 공원이 많은데요. 그곳들을 도장 깨기 하듯이 하나둘씩 드나들고 있어요. 처음에는 아파트 단지만 빙빙 돌았는데, 한동안 그러다 보니 좀 지겹더라고요. 그리고 아파트 단지는 사람들의 소음이 없을 수 없어서 조금 더 조용한 곳을 찾고 싶기도 했고요. 방향을 틀어 숲을 낀 공원들을 찾아 걷기 시작했어요. 아이들과 늘 가던 공원들이었는데, 혼자서 가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아이들과 갔을 때는 놀이터 근처만 맴돌게 되는데 혼자 가게 되니 인적이 드문 숲길을 걷게 됩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등원, 등교를 하고, 직장인들은 모두 출근을 한 아침 시간. 공원 숲길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두 분 마주치기는 해도 소음이 일어날 일은 없지요. 고요한 숲길을 걸을 때는 좋아하던 음악도 끄고 이어폰도 빼버립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로 가득한 숲길을 반복해서 걸으며  상념을 버리는 연습을 해요. 나아지는 연습도요. 그 시간이 정말로 좋습니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처럼 느껴진달까요. 좀 덜 걸은 날에는 괜히 마음에 날이 설만큼, 요즘 저는 걷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다.


또 하나 빠져 있는 일이 있어요. 바로 집밥을 하는 일입니다. 저는 정말 요리를 못하는데요. 사실 이제껏 요리에 취미나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요리를 할 일도 없었어요. 생각해 보면 28살부터 독립을 했으니, 잘하려고 했다면 꽤 잘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마음이 안 먹어지더라고요. (모든 집안일 중에 요리가 가장 싫은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휴직을 하면서, 뭐랄까요. 경제 활동을 하지 않게 되니,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좀 찾아 해야 하지 않을까, 책임감 같은 게 느껴졌어요.(여기서도 책임감이군요. 지긋지긋한 책임감!) 어쨌든 생각해 보니 가장 표시 나는 일이 집밥 하기더군요. 아시다시피 청소는 해도 해도 별 표시가 안 나고, 설거지는 집밥을 먹나 배달음식을 먹나 해야 하는 일이고, 빨래도 이러나저러나 안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요리는 안 하면 시켜 먹을 수밖에 없으니 바로 표시가 나더군요. 생활비에서도 꽤 많은 차이가 났고요.


처음에 ‘집밥을 해 먹어보자!’ 마음먹었을 때는 할 줄 아는 건 별 없는데, 매일 돌아오는 끼니를 준비하는 게 정말 괴로웠습니다. 심지어 저희 집 두 아이는 아직 어리고, 남편은 성인이니 다른 식단을 준비할 때도 종종 있었어요. 설상가상으로 두 아이의 식성이 전혀 달라서 두 아이의 식단까지 다르게 준비할 때는 세 가지 메인메뉴를 준비하는 날도 있었답니다. (메인메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지만 실상은 소박한 것들입니다.)


어쨌든 가족을 위한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엄청난 품이 드는 일이더군요. 우울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것만큼은 하려고 했어요. 아마 누구에게도 우울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뭔가를 하는 모습에 더 집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장을 보고, 매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배달의 민족‘ 어플도 지워버렸습니다. 그렇게 배달음식을 먹지 않은지 벌써 넉 달째 접어들고 있어요. 여전히 할 수 있는 요리는 한정적이고, 식탁에 오르는 요리도 몇 가지 메뉴의 돌림노래이지만 이제는 재료를 손질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에 제법 속도도 붙고 요령도 생겼습니다. 아이들도 당연히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다고 생각하는지, 배달음식을 전혀 찾지 않고요.


몇 달 동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우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다 이 바다에 내가 빠져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편지를 쓰다 보니 저는 참 열심히 저만의 호흡을 찾아가고 있었네요. 음파, 음파, 발이 닿지 않을 때면 더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살아내 보려고 애쓰고 있었군요. 아, 스스로가 참 미웠는데 별안간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게 또 글쓰기의 기적인가요.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요. 인용해 주신 쇼펜하우어의 말은 결국 오늘을 충실히 살라는 말이네요. 다시없을 오늘을 충분히 살아내라는, 니체의 카르페디엠과 같은 맥락이고요. 철학 책, 인문학 책을 읽어보면 결국에는 모든 결론이 그렇게 귀결되더라고요. 오늘을 충실히, 현재를 충분히 행복하게 보내라고. 그런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알면서도 실천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한동안은 철학 책, 인문학 책을 멀리 했어요. 여전히 쉽지 않고요. 저는 요즘 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지 않아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여전히 제게는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고 갈등의 불씨도 살아 있어요. 이 모든 것들을 품고 사는 이상, 어떤 하루를 살아도 조금은 무겁고 버거운 순간들이 찾아올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매일을 살아내고 싶어요.


얼마 전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수산나 타마로)라는 책을 읽었어요.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손녀에게 쓴 편지 형식의 글인데요. 팔십의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회고하며, 생을 통해 손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은 글이었어요. 마지막 장을 통째로 줄을 그었답니다. 이렇게 마음에 꼭 들어오는 책을 만나면 어찌나 반갑고도 감사한지요.


너 스스로를 잘 돌봐야 한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종종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어질 때마다 이걸 꼭 기억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바꾸어야 할 것은 언제나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생각 없이 뭔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단다. (중략)
넌 세상 모든 것들의 안에도 있어 보고, 바깥에도 있어 봐야 해. 그래야 그늘과 휴식처를 제공할 수 있고 너 자신도 적당한 계절에 무성한 잎들,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네 앞에 수많은 길들이 열려 있을 때, 그리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아무 길이나 들어서진 마. 내가 세상에 나오던 날 그랬듯이, 자신 있는 깊은숨을 내쉬어 봐. 어떤 것에도 현혹당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고 기다려 보렴.
네 마음이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봐. 그러다 네 마음이 말을 할 때, 그때 일어나서 마음 가는 대로 가거라. (277-278)


지금 저는 기다리는 중이에요. 스스로를 잘 돌보지 못했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내 안에 무엇을 어떻게 바로잡아나가야 할지 고민합니다. 스스로와 끝없이 마주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에요. 나 바깥에 존재하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았지만, 이제는 제 안에도 머물러보려고 해요. 지금 제 앞에 놓인 수많은 길들 중에 어느 길이 진정으로 제가 원하는 길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마음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중이에요.


흘러간다는 단어를 몇 번 쓰면서 생각해 보니, 얼마간 우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던 제가, 이제는 제법 그 바다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흘러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흘러가봐야겠어요. 흐르고 흐르다 보면 어딘가에 닿지 않을까요. 과거에 우리가 글쓰기의 바다에서 만나 서로에 가 닿았던 것처럼, 또 어딘가에 닿을 수 있겠지요.


편지를 마무리하며, 문득 요즘 작가님의 ‘음파, 음파’는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밀라노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의 삶을 듣는 일일까요? 오랫동안 이어오고 계신 슬로우리딩일까요? 다음 편지에는 작가님의 호흡법을 조금 더 들려주셨으면!


아, 오늘 밤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더울 것 같네요. 아직까지 호기롭게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고 견디는 중인데 아무래도 이번주가 저물기 전에 에어컨을 가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다음 편지를 쓸 때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쓰고 있을 것 같네요. 작가님과 다시 한번 한 계절을 넘어갈 수 있음에 감사한 밤입니다.


From.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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