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에스, 아일릿, 키키, 하츠투하츠
뉴진스 데뷔작을 들으며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보컬의 낮은 음역대였다. 상큼 발랄한 컨셉을 내세웠지만 보컬 음역대가 소위 3옥타브 도(C5)를 앨범 내내 한 번도 넘지 않았고, 그 이상의 고음은 거의 대부분 가성으로 산뜻하게 넘겼다. 뉴진스의 노래들은 이처럼 저음역대 보컬을 리듬과 가사 음절을 자잘하게 쪼개고 음색 연출을 다듬어 세련미와 활력을 담보했고, 이 저음역대 보컬은 가창자에게도, 청자에게도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며 팀이 표방하는 자연스러움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뉴진스가 이러한 이색적인 보컬 활용을 통해 편안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큰 파급력을 일으키자, 이후 주요 기획사들은 뉴진스로 대표되는 새 흐름에 걸맞는 새로운 걸그룹을 내놓았다. 이처럼 저음역대 보컬을 내세워 자연스러움을 연출하는 것을 기반으로, 서로 다른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지금 시대의 걸그룹들을 알아보자.
2022년 말 트리플에스 첫 유닛 AAA의 데뷔곡 ‘Generation’을 처음 들으며, 뉴진스 데뷔작의 영향력이 이렇게 빠르게 뻗쳐갈 수가 있나 싶어 놀랐다. 뉴진스를 연상케 하는 비음 섞인 저음 보컬 활용을 뉴진스 데뷔 이후 반 년도 되지 않아 그대로 가져왔다고 보는 게 정말 맞을까? 아니면 정병기 대표도 민희진 대표처럼 소위 ‘미감'의 완성도에 관심이 많던 제작자인 만큼, 이전 시대 걸그룹과 다른 방식의 보컬 활용이 필요하다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걸까?
적어도 정병기가 추구하는 보컬 활용이 오래 전부터 기술적 역량 과시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달의 소녀 시절부터 가창의 기술적 완성도보다 어린 목소리 특유의 싱그러움을 더 강조하는 보컬 디렉팅을 추구했고, 이 싱그러운 목소리를 정교하고 꽉 찬 사운드로 뒷받침하여 완성도를 담보했다. 이러한 정병기의 취향은 트리플에스의 결과물 곳곳에 남아 있다. 유닛 타이틀곡 ‘Cherry Talk’이나 ‘Girls’ Capitalism’, 앨범 수록곡 ‘Colorful’, ‘Non Scale’이나 ‘가시권' 등지의 여린 목소리들과 이에 걸맞게 묘하게 고음역대가 강조된 사운드 조형은 명확히 정병기의 지장 아래 있다.
그의 오래된 보컬 취향이 뉴진스 시대에 걸맞게 펼쳐진 결과물이 ‘Generation’ - ‘Rising’ - ‘Girls Never Die’ - ‘깨어' 를 잇는 ‘랄랄라' 코러스다. 그룹 트리플에스의 시작을 알린 ‘Generation’에서 시작된 ‘랄랄라' 코러스는 이후 완전체 시리즈 “ASSEMBLE”의 타이틀곡을 상징하는 대목이 되었다. 베이스와 드럼이 강조된 프로덕션은 곡에 무게감을, 다인원의 힘으로 외치는 중저음의 코러스는 대규모 퍼포먼스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타 수록곡이나 유닛 결과물에 비해 이례적으로 무거운 질감의 사운드는 꿈을 향해 달리는 서울의 소녀와 이들이 꾸는 꿈의 이면을 어두운 색채로 그려낸다. 그리고 24인이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와 코러스는 꿈을 향해 손을 맞잡고 삶을 버텨내는 생존의 연대의식을 그리며, 이 그룹의 규모와 구조를 청자에게 납득시킨다.
이러한 보컬 연출의 맹점은 각 멤버의 기여도를 주목하고 발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1인당 한 소절도 제대로 부르기 어려운 24인조의 규모와, 보컬과 댄스 기술보다 각자의 캐릭터를 우선시하는 그룹 운영은 각 멤버의 퍼포머로서의 기량을 부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정병기 본인이 회사 소속 디렉터로서의 기량으로 얻은 주목도를 기반으로 직접 그룹 제작에 나섰기에, 기획자에 대한 호오가 곧 그룹에 대한 호오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멤버보다 기획자가 우선시되는 구도 속에서는 멤버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진로 결정의 행방을 온당히 평가받지 못하고 기획자의 행보와 사실상 동일시되어 평가받을 수 있음을 뉴진스가 보여주고 있다보니, 트리플에스를 보면서도 멤버의 영역이 어떻게 확대되어야 각 퍼포머가 좀더 온당히 드러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Magnetic’의 첫 대목, “wait a minute”을 들으며 느낀 것은 아무래도 기시감이었다. 살짝 비음 섞어 멜로디를 끌어가는 민주의 목소리는 뉴진스 이후 걸그룹에게 요구되는 그 저음역대 소화 방식을 완벽하게 체화한 결과물이었다. ‘Lucky Girl Syndrome’의 보컬 구성도 마찬가지로, 뉴진스의 전유물 같던 낮고 가벼운 보컬 연출이 다른 그룹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2000년대의 캐스커를 연상케 하는 멜로딕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키치한 소녀문화 오브제와, 민주로 대표되는 중저음의 보컬이 그 오브제에 둘러싸인 소녀를 최대한 과장 없이 찍으려는 렌즈와 연결되어 그룹 아일릿을 구성했다. ‘나'와 친구들만 있는 ‘나만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극도의 소녀다움을 조명하는 구도에서는 과거 러블리즈나 우주소녀로 대표되는 ‘청순' 걸그룹이 떠올랐는데, 허세련 디렉터를 내세워 중저음 보컬을 재료로 ‘나'의 자의식을 앞세우는 소녀를 그렸다는 점에서 현대적 접근을 적극 가미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나만의 세계'는 점점 판타지를 지향하며 더 다채로운 목소리를 보여준다. 마법소녀 컨셉을 훨씬 드러내며 보다 임팩트 있는 무대 연기를 보여주는 ‘빌려온 고양이'가 ‘Magnetic’이나 ‘Cherish’에 비해 보다 넓은 음역대를 기존 걸그룹에 가깝게 부르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숏폼 시대를 직격하는 이들의 음악은 결코 무거워지지 않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낮고 가벼운 보컬을 체화한 멤버들의 기량이다. 이렇게 아일릿은 소녀의 판타지를 아주 가볍고 키치하게 그려가는 그룹으로서 뉴진스와는 별개의 영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키키는 데뷔 티저에서 던져놓은 범상치 않은 이미지로 큰 기대를 모았다. 자연 배경을 매우 제멋대로 활용한 이미지들은 그룹의 방향성을 예고하는 듯 했지만, 실제로 그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음악은 아직 최전선에 드러나지 않았다.
뉴진스의 음악적 특징을 만들어낸 프로듀서가 BANA 소속 250, FRNK였다면, 현재까지 키키에게 가장 독특한 곡을 준 프로듀서는 릴 체리와 골드부다다. 국내 힙합 씬에서도 유독 별난 음악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두 사람은 그 특유의 별남을 ‘DEBUT SONG’에 녹여냈고, 이 곡은 ‘데뷔'의 이미지를 콜라주한 뮤직비디오와 함께 팀의 데뷔를 유별나게 기념했다. 이들은 데뷔 EP “UNCUT GEM”의 다수 수록곡에 참여했는데, 각 곡에서 힙합스러운 지점이나 독특한 연출을 들으며 그것이 릴 체리와 골드부다의 공일지 상상해보게 됐다.
다만 “UNCUT GEM”의 타이틀곡 ‘I DO ME’는 무난한 구성의 팝이다. 힘 있는 저음역대의 보컬 연출을 통해 자연 배경에 어울리는 자유분방함을 표현했지만 티저 이미지나 ‘DEBUT SONG’ 등 타 수록곡의 비범함과는 괴리를 보였다. “UNCUT GEM”은 이처럼 팀의 보컬 활용법을 탐구하는 여러 접근을 담았고, 톤을 살짝 올린 ‘DANCING ALONE’이나 여린 목소리를 담은 ‘To Me From Me’까지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확실한 방향의 이미지와 달리, 그룹의 음악적 영역을 모색하는 중인 키키가 어떤 곳에 정착할 지 기대하고 있다.
‘The Chase’를 여는 가볍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SM 걸그룹도 뉴진스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음을 예고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코러스를 깔아 이어받는 바로 다음 대목은, 뉴진스 시대의 걸그룹을 만들면서도 코러스 라인을 놓지 않는 SM의 집착이었다.
하츠투하츠의 결과물에는 뉴진스로 대표되는 시대상과 SM의 전통적 접근이 군데군데 섞여 있다. ‘The Chase’에 이어 ‘Focus’에서도 비음 약간 섞인 저음을 전면 배치하고 고음을 대부분 가성으로 처리하며 그룹의 동시대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한편, 이 저음을 코러스로 처리하며 보컬 합 맞추기에 몰두하는 회사의 전통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저음역대의 활용을 신비롭고 미스테리한 이미지로 연결하며 그룹의 동시대적인 접근을 만들어내지만, 이처럼 산뜻한 이미지를 짙은 색채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표현하는 것도 SM의 여러 전작들과 맥이 닿아 있다.
반면 ‘STYLE’이나 ‘Pretty Please’는 보다 다채로운 음역대와 가벼운 사운드로 전통적인 걸그룹의 모습을 그린다. 이런 곡에서 하츠투하츠는 SM이 내놓은 두 번째 다인원 걸그룹으로서 소녀시대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와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행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SM 아이돌을 애호하는 팬덤의 존재다. 이 전통적 청자를 바탕으로 2020년대에 맞는 음악을 통해 동시대적인 팬층을 함께 가져가려는 하츠투하츠의 시도가 결과적으로 어떤 팬덤을 구축하게 될지 지켜보게 된다.
2022년 이후 데뷔한 여러 걸그룹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케이팝 걸그룹이 자연스러움을 표방하려면 사실 아주 정교하게 가공된 이미지와 요철 없는 매끈한 음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매끈하고 정교한 이미지와 음악을 기반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캐릭터의 방향성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현 시점 걸그룹들을 통해 여러모로 실감하게 된다. 비슷한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 목소리들이 앞으로 어떤 캐릭터를 표현하게 될 지, 그 캐릭터에 따라 또 어떻게 목소리가 뻗어나가게 될 지 이 둘을 같이 주목하며 지켜보자. 그것이 지금의 걸그룹에 오랫동안 흥미를 부여하는 지점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