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을 마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울대 입구역에 내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도보에 엎드려있는 누군가가 순간 눈에 띄었다. 형광색 운동화를 신고, 등산복을 입은 그 사람은 손바닥은 위로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흔 정도로 보였다. 옷차림은 엎드려 있는 모습과 대비되게 깔끔했다. 그 즉시 일어나면 그냥 횡단보도를 같이 기다리는 보행자로 보일 정도였다. 그분의 앞에는 비타오백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안에는 동전 몇개가 듬성듬성 있었다. 지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엎드린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보였다.
여기로 이사 온지 어언 4개월이 지났는데 이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코로나 때문이라 이 분들 또한 그동안 개점휴업하셨나 보다. 근데 내가 인상 깊었던 건 보통 이 분들은 길가에 계시거나, 지하철 출입구 계단 쪽에 계시는데 이 분은 다소 뜬금없는 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4차선, 횡단보도 양옆, 차들은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서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이 곳, 보이는 건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뿐 그리고 그 옆에 햇빝을 막을 용도로 우뚝 서있는 파라솔, 그 분은 하필 그 파라솔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지탱할 것 하나 없이 홀로. 그늘도 없이...
부끄럽게도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나는, 그날은 가방에 있는 지갑을 꺼냈다. 지갑엔 만원짜리 2개, 천원 짜리 2개가 보였다. 무엇을 드려야 되나 잠깐 고민했다. 만원짜리를 집기엔 내 처량한 상황이, 천원 짜리 2개를 드리기엔 그분의 처량한 상황이 대비되서 한동안 고민했다. 하필 동전도 없었다. 동전이라면 고민도 없이 우선 넣었을 텐데..2천원을 꺼내려다 순간 멈칫했다. 다시 돈을 지갑에 집어넣었다.
얼마 전 봤던 소설 <빅파파>가 생각났다.
그 책은 누군가에게 비웃음 받고, 부당한 취급을 받는 주인공들이 사회에 저항하는 이야기였다.
이 책에서 나온 인상깊은 구절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불쌍한 사람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까놓고 말해보자. 사실 당신들은 자위하는 거 아닌가? 예를 들자면, 그래, 그래도 난 쟤네들보단 낫지. 사지도 멀쩡하고 사람 구실은 하고 사니까, 라는 식으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 나온 이 구절처럼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던 건 사실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왜냐면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지갑에 손을 넣고, 겨우 2천원을 꺼내려 한 나, 그날은 유난히 몸이 피곤해서, 내 진로가 불안해서, 배고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 날 바닥에 엎드린 누군가에게 2천원을 주면서 '나는 그나마 낫구나'라고 생각할 나 자신이 초라했다. 그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넜고, 바닥에 엎드려계신 그분은 언제 집에 갔는지는 모른다.
단지 하나 다짐한건, 다음번엔 내가 남을 동정하면서 '자기 위로'할 감정이 아닌 지극히 편안한 마음일 때 꼭 도와드릴 거란 사실이다. 그래야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천원을 다시 내 지갑에 넣으며 나는 나에게 구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