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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곰씨 오만가치 Jun 05. 2023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 손에 맞는 가위가 너에게도 맞을까?

동기부여를 위해 쏟아지는 콘텐츠는 어느 SNS를 찾아도 바로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그런 콘텐츠와 연관이 되어 있어 그렇겠지만 살펴보다 보면 '굳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들은 하나 같이 '~하는 방법', '~해야 하는 것'과 같은 법칙을 설명하려 든다. 그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으며 마치 성공을 위한 가이드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콘텐츠를 보면 처음엔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만나지 못한 내용들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마치 좋은 책 한 권을 소개받은 기분이 든다. 너무 유명한 멘트에는 만드신다고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상기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 좋은 말과 글을 정리해서 재발행하는 일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고서들이 묻히지 않은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참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반면에 콘텐츠 생산자들의 그런 확신에 찬 말투와 문장은 그들의 신념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강력한 신념은 어디에서 오는가? 살아온 인생의 지혜일까. 아니면 앞으로 그렇게 살기로 작정한 자기 암시일까. 아니면 그저 숨겨진 연기에 불가할까. 좋은 글 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마음을 긁어보고 싶은 건 아마 나의 삐딱함에 더해진 부러움일 거다.


시대가 거듭될수록 위인이라는 사람들의 수는 늘고 그들이 쏟아낸 말과 글은 무수히 많다. 그것을 잘 버물려 좋은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일종의 커뮤니케이터는 우리 시대에 분명 필요한 역할이다. 심오한 말의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거나 긴 글을 짧게 정리해 준다. 커뮤니케이터라는 인식에서 그것을 바라보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려고 하면 불편함이 생기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커뮤니케이터와 달리 인생의 신념을 전달하는 경우는 말로만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받은 신념을 자신의 인생에 녹여내 얻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마치 내 것인 마냥 확신하는 모습에는 스스로 거부감이 생긴다. 내가 해보니 진짜 좋더라 정도의 경험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 말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성취도 필요할 것 같다.

내가 겪고 느낀 것을 적어내다 보면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나에게 맞는 가위가 상대에게도 맞지 않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굳이 법칙이니 뭐니라고 얘기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참고할 것이고 믿고 행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그 말투에 '확신'을 담아 얘기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가끔은 무책임한 행위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사실 그것 자체가 과민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도 아닌 걸.


자기 계발서를 읽을 때 기대를 가지지 않게 된 건 꽤 오래되었다. 지금은 드문드문 읽고는 있지만 굳어 더 읽을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왜냐면 그네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계발서는 자신이 존경한다고 싶은 사람의 것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글 자체의 우아함보다는 내가 존경하고 따라 하고 싶은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과학에서 마지막까지 진실일 수 있을 거란 법칙은 '엔트로피'다. 그렇다면 자기 계발서에서 가장 진실에 가까운 메시지는'실행하라'다.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행동으로 바로 옮길 수 있는 게 중요하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는 결국 '하라'로 귀결된다. 그것은 어느 책도 가르쳐줄 수 없다. 공부를 해야 공부법이 소용이 있고 글을 써야 작법서가 쓸모가 생긴다. 운동을 해야 살이 빠지고 책을 읽어야 지식이 는다. 행동하지 않은 채 방법만을 찾고 있는 사람은 그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 줄 작은 이유를 찾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법칙이라고 이름 붙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건 없다. 그렇다고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면 사람들이 들어주질 않는다. 강한 어조로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대중 앞에 서면 자신의 성취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동기 부여만 할 것이 아니라면 발언자의 파워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강원국 작가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읽고 싶은 작가가 되는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확신에 찬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영향력이 없어 그런 걸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는 김승호 회장의 영상을 자주 만난다. 신념이 가진 자의 멋있음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은 신념도 남다를 것이다라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다. 귀를 쫑긋하며 들어보면 대부분 아주 기본적인 것이며 상식적인 것이다. 너무 속도에 집착한 나머지 놓치는 것들에 대한 얘기가 많다. 그 표현 방법에는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거다. 전하는 노하우 속에는 나와 잘 맞는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알아내려면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느 정도 괜찮은 방법을 찾아냈다면 꾸준히 해보는 게 중요하다. 결국 나에게 맞는 방법은 나 말곤 찾을 수 없다.


분명 나도 나만의 생존 공식은 있다. 그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특화된 생존 법이며 아무래도 나 정도 살아내는 방법일 거다. 그렇게 솔깃한 삶도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맞는 열쇠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다. '저는 이랬는데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네요' 정도가 좋은 것 같다. 지나가는 위로의 말도 할 수 있고 살아온 이야기 정도의 공유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할 만큼의 위치는 아닌 듯하다. 그래도 내가 경험하고 느낀 점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한 듯하다. 그리고 글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유기도 하다.


학교를 다닐 때 수업을 듣다 보면 서울대 출신의 교수님들보다 지방대 출신 교수님들의 수업이 훨씬 재밌고 이해가 쉬운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탁구장에서 레슨을 받는데 '왜 이걸 못하지'라는 듯 쳐다보는 국대 출신의 코치보다 하나하나 정성껏 가르쳐 주는 대학 선출 코치의 레슨이 더 좋은 이유처럼. 국대의 그 미묘한 팁은 그 수준이 되었을 때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스티븐 잡스의 그 말을 멋있어 좋아하는 하지만 그 진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DNA를 가지고 있듯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과 신념이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결이 맞는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내 손에 맞은 가위가 나랑 비슷한 손을 가진 이들에게 유용할 거란 기대로 글을 쓴다. 존재 자체도 다르지만 우리가 놓은 환경도 다를 수밖에 없다. 삶이 오롯이 개인의 선택과 판단만으로 결과가 나온다면 무수히 쏟아지는 명언들로 잘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 세상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운이 70% 이상 개입된 결과는 그저 행운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 운이 얼마나 개입되었는지 아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운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듯 어쩌다 마주친 사소한 이야기가 삶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이도 언제 어떻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신념'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길 바라본다. 지금 쓰는 작은 경험 속에 나도 모를 신념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조금은 더 강인한 메시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오늘도 노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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