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터C Apr 13. 2020

속도와 편의 너머의 숨은 가치

<그리움 스물여섯> 

- 관계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는 그리움이다상대가 당신에게 더는 그립지 않아라고 말한다면그건 당신의 허물을 허물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자신이 없어졌다는 뜻이거나 거짓말하기 싫어졌다는 뜻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할 만큼 푸른 봄날, 통영 산양읍 풍화리 박병길 할아버지가 오래된 거룻배에 몸을 싣고 포구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 느리다. 모든 것이 흐르고 있을 때, 저 혼자만 멈춰 선 듯 보인다. 바람 때문이다. 나아가면 밀어내고 나아가면 또 밀어내고. 관절마디 시린 팔 부지런히 놀려가며 노를 젓지만 도통 변화가 없다. 아, 애꿎은 바람. 할아버지가 밭은 숨을 연신 토한다. 뒤를 보니 큰 고깃배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잘도 달린다. 

    “고기도 읎고 해서 고마 돌아올라 카니깐 바람이 탁 부는기라. 아이고야 숨차 죽겠네.”  

    겨우 포구로 들어온 할아버지의 망태기에는 해삼 여남은 개와 놀래미 새끼 대여섯 마리가 고작이다. 그래도 표정은 어둡지 않다. 

    “이 정도면 됐다 안 카나. 담배도 피고, 막걸리도 묵고, 용돈도 쓰고 말이다. 자석들한테 손 안 벌리는 기 어디고.”  

    할아버지의 고마운 거룻배는 그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다. 50년 전쯤 바다에 둥둥 떠다니던 주인 없는 것을 주워왔다. 당시도 제법 낡은 티가 났다는데, 그렇다면 대체 몇 년이나 됐다는 것일까? 하지만 상태는 아직 양호하다. 무엇이든 같이 나이가 들면 애칭 하나쯤 지어주는 법. 

    “이름 같은 기 붙인 적 읎다. 넘들이 그냥 ‘뱅길이네 덴마’라 카긴 한다. 그라고 보니 그기 이름이네.”  

    할아버지에게도 엔진 달린 배가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바다는 대부분 거룻배와 함께 한다. 비록 작지만 타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하고, 붙인 정 뗄 수 없단다. 속도는 느리지, 힘은 들지. 빠르고 편한 것이 최선인 세상에서 ‘뱅길이네 덴마’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물건의 가치를 효율에 집착해서 찾는다면 우리 옛것 중 몇이나 남을까?       



#덴마 #거룻배 #통영 #봄날

이전 26화 생솔가지 매운연기에 눈물 훔치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