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고 한다. 제목이 제목답게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요즘 한국 사회가 워낙 어수선해서 그런지 몰라도 인터넷엔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 '한국이 싫은 이유' 같은 글이 자주 보인다. 나 역시 한국을 떠나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아마도 나는 '한국이 싫다'라고는 말 못 할 것 같다. 굳이 말하라면 나는 한국에서 사는 내가 싫었다.
조언과 충고를 가장한 무례함과 선을 넘는 참견을 견딜 수 없었다. 사람들은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기준대로 정의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답을 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걸까. 내가 바란 건 딱 하나 '저런 애도 있구나' 하며 넘어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내가 입시에 실패해 대학을 가지 않겠다 결정한 것도, 내가 여성임에도 쇼핑과 화장에 관심이 없는 것도, 내가 20대 초반인데도 연애나 이성에 관심이 없는 것도, 내가 자신들과 다름을 그냥 무시해 주길 바랐다. 나라는 존재가 대체 왜 언제나 다이어트, 쇼핑, 연애, 결혼 얘기만 해대는 그들에게 최고의 술자리 안주거리가 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월급으로 뭐 해? 옷 좀 사.'라던가 '살 좀 빼.' 같은 무례함을 넘어선 폭력을 참으며 단순히 그들이 아닌 그들이 대변하는 이 사회가 나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는 나는 무시당했다. 나이 대신 학번을 물어보는 것도, 나이를 들으면 무조건 어느 대학을 다니냐 물어보는 것도, 내가 수억 원대 자산가가 되지 않는 이상 이 사회에선 이 질문들이 나를 끊임없이 따라다닐 것이란 걸 깨달았다.
한 번도 날씬한 적이 없었던 것도, 큰 엉덩이를 매번 긴 상의로 가리고 다녔던 것도 수치였다. 한국에서 살려면 이를 악물고 살을 빼야만 했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뚱뚱한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난 캐나다에 오자마자 골반과 몸매에 대한 칭찬을 정말 많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엄청 살이 쪄서 다 옛말이 됐다.)
나의 부모님은 굉장히 개방적이고, 외동딸인 나를 전적으로 응원하는 분들이었지만 한국의 사회에서 만난 다른 어른들은 언제나 '여자애가', '여자는'을 습관처럼 했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것 말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른 성과 차별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신체적인 차이는 있지만 사회에서 차별은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전혀 그런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받는 충격이 더 컸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나는 쭈구리였다'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나는 원래 밝고,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이었는데 입시를 실패하며 자신감을 완전히 잃었다. 남들보다 일찍 사회에 나가 여초집단에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도 완전히 잃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불행했다. 그게 사회 탓이던 그 사회 구성원으로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적응하지 못하고 패배자가 된 내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더 살고 싶지 않았다.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다가 문득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미국, 그것도 뉴욕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는 게 너무 억울해졌다. 그래서 돈을 벌고 여행을 할 목적으로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했고, 그렇게 캐나다 땅을 밟고 10년이 지났다.
난 이곳에 오자마자 교포로 오해받았을 만큼 이 사회에 잘 적응했다. 아니 적응을 따로 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다. 서서히 나의 원래 밝은 성격과 모습을 찾아갔다. 하지만 '한국이 싫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많은 추억을 만들고 꿈을 키웠던 곳.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 친한 친구들이 사는 곳. 나는 비록 한국에서의 내가 싫어 한국을 떠났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내가 되어 다시 한국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그때의 3년은 현재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아무리 당신이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산들 '한국이 싫다' 라든가 '한국은 망했다'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말해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