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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쓰 Feb 18. 2020

6. 프로 불편러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하자 비자 상관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내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살았던 '내 나라'에 돌아와 '프로 불편러'라는 별명을 얻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나의 한국행 계획을 들은 밴쿠버 한국인 동생들이 하나 같이 나의 결정을 걱정하며 한껏 겁을 줄 때만 해도 '이거 왜 이래.. 내가 너네보다 한국에서 오래 살았어'라고 말하며 내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막상 한국에 오니 전에 한국에 잠깐 놀러 왔을 때와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가장 먼저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미세먼지! 세상에, 세상에..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기침과 재채기를 하기 시작하고 공항에서 엄마를 만나 주차장으로 가는 길엔 코가 매운 게 느껴졌다. 음식을 먹고 입이 매운 것도 아니고 코가 맵다니... 그동안 한국의 공기가 더 나빠진 건지 아니면 내가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지역 이동을 하고 더 맑은 공기를 마시다 와서 그 차이가 더 심하게 느껴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코가 맵고 콧물이 나기 시작했고 이것은 심리적인 불편함이라기보다는 신체적인, 진짜 몸으로 느끼는 불편함이었다.


그 이후 날 불편하게 만든 상황은 주로 지하철이었는데, 굳이 공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내 몸에 밀착하여 자리를 잡는 아주머니. '뭐지?' 싶어 상체를 돌려 휙 돌아봤더니 오히려 그분이 놀라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간다. 자신의 몸에 닿았던 무언가가 확 빠지니까 놀란 모양이었다. 바로 이상한 기분이 들어 가방에 지갑이 잘 있는지 확인했으나 괜한 기우였다.

언젠가 지하철에 사람들이 가득 찬 상황에서 내리기 위해 '내려요'를 세네 번 외치며 조금이라도 길을 터주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당황했다. 나를 피하기 위해 상체를 약간, 아주 약간 움직이는 정도의 수고 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에 놀람과 동시에 짜증이 솟구쳐 적당히 사람들을 밀치며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철저하게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일명 어깨빵이라 부르는 그것을 할 줄 몰라서 안 하고 있는 게 아닌데, 내가 마음먹으면 다 나자빠질 텐데.. 라며 쓸데없는 생각을 좀 하고 나니 비로소 분이 풀렸다. 결국 공공장소에서 양보하지 않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태원 사고가 터졌다고 생각한다. 

차를 타고 다닐 땐, 술에 잔뜩 취해서 아무렇지 않게 차도를 걸어가며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 젊은 애들과 다니는 차량이 많은 2차선 도로에서 비상 깜빡이도 안 켠 채로 정차 아닌 주차를 하고 있는 학원차량들,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며 무섭게 도로 위를 질주하는 도로의 무법자 오토바이들 등...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만 이상한가' 싶었는데 토론토에서 알게 된 한국인 동생을 만나 오해를 풀었다. 그녀는 물건을 구입하며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번호를 남겼는데 이후 광고 카톡을 받고 폭발했다. '나는 번호만 줬을 뿐 마케팅 정보 수신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이런 걸 왜 보내냐!'는게 이유였다. 또 함께 식당에서 함박 스테이크를 먹다가 원산지 표기에 의문을 품고 직원에게 물었다. '외국산이 어디 외국을 말하는 거죠?' 매니저란 사람은 '자기네는 유통업체에서 알려주는 데로 표기할 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고, 그 대답은 내 친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음식을 만들어 파는 회사에서 그 음식의 재료가 어디서 오는 건지도 모르고 유통업체에서 알려주는 데로 표기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이런 큰 회사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에서?" 매니저는 '네 말이 맞다'며 사과했지만 개선의 의지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저 사람은 분명 속으로 '진상 고객. 적당히 미안하다 하고 보내자.' 싶었을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다. 내 나라에 대한 애국심도 있고 우리나라의 좋은 점도 많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 이 땅에 발 붙이고 살고 싶지 않게 만들었던 점들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났었는데 나는 왜 굳이 다시 돌아왔을까?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아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런 점들보다도 오랜만에 부모님과 다시 살아서 좋고, 동네에서 친구들과 치맥 하며 즐겁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게 더 큰 것 같다. 그래도 한국에 살 땐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갔던 많은 부분들이 심각하게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도 결국 변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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