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듯 낯선 곳에서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한국행 왕복 비행기표를 사서 한껏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 있을 때 친한 한국인 언니가 진지하게 해 준 이야기가 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이곳에서 그 언니와 나는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한국인 친구였는데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온 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 언니는 이곳 사람들에게 굳이 말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태어난 줄 알 정도로 영어를 잘했고 나 또한 한창 현지식 영어가 급속도로 늘던 중이어서 우리 둘의 대화엔 항상 영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었다.
"한국 가서 영어 단어 섞어 쓰면 진짜 재수 없다고 생각할 거야"
언니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며 한국에서 말할 때 주의할 점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첫째, 영어 단어를 섞어 쓰지 말 것.
이곳에서 생활하며 자주 말하게 되는 단어들은 한국어 단어보다 영어 단어가 더 빨리 생각난다. 게다가 한국어 단어가 한자어로 이루어진 단어라면 시간을 들여 생각해 내려고 노력해도 쉽게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에도 영어 단어를 굉장히 많이 쓰는데 예를 들면 "가까운 은행 브랜치(Branch)를 갔는데 윗드로(Withdraw)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텔러(teller)한테 가서 컴플레인(Complain) 했지."
같은 식인데 한국어로는 지점을 뜻하는 브랜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며 비행기표를 왕복으로 샀다고 말하려는데 왕복이란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아빠에게 "갔다가 다시 또 오는 거를 뭐라고 하지?"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심지어 엄마는 이런 내게 "남들이 보면 외국에서 한 10년은 살다 온 줄 안다"며 유별나다 했지만 일부러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빨리 안 돌아갔다.
한국에서 말할 때 영어 단어를 섞어 쓰면 안 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남들이 재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님처럼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못 알아듣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포라면 차라리 "어쩌라고" 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말할 텐데 엄마처럼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상황이라 그렇게 맘 편하게 하지도 못한다.
둘째, 현지 발음으로 말하지 말 것.
나에게 조언을 해준 언니는 실제로 한국에 가서 커피를 주문할 때, "어메리(r)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말했고 말하자마자 후회했다고 한다. 정작 커피 주문을 받던 그 아르바이트생은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말한 사람 입장에서 괜스레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상에서 엄청 많은 영어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영어 단어들은 철저하게 한국식 발음으로 쓰이기 때문에 영어라는 생각이 굳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영어식 발음으로 이런 단어들을 이야기하면 위의 이유와 마찬가지로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듣거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언니의 조언을 잘 새겨들은 나는 한국에 와서 내 뇌를 철저하게 '한국어 모드'로 전환한 후 생활했다. 자주 횡설수설하고, 때로는 불편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잘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교포들이나 어릴 때 이민을 간 사람들처럼 영어가 완벽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영어로만 말할 때도 힘든 부분은 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거나 익숙한 억양이 아니면 잘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최고의 대화 상대는 나처럼 이곳에 온 지 5-6년 정도 된 유학생들이 나이 민자들인데 이런 사람들과 대화할 땐 한 번 더 생각하거나 필터로 거르는 것 없이 생각난 대로 바로바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수다를 떨 수 있다.
영어 단어들을 섞어서 말하는 것과 한자로 된 어려운 한국어 단어를 기억 못 하는 건 기본이고 가끔은 한국어 단어를 다르게 말하거나 한국어를 철저하게 영어식으로 말하는 실수를 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야, 이 0개 국어야"라고 놀리며 웃는다. 내가 어떻게 말하던, 어떤 실수를 하던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부담 없이 맘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한국인 친구들하고 굉장히 자주 만나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되었다.
0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금에 와서야 규칙적으로 글을 쓰게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던 나로서는 예전에 비해 말을 잘하지 못하게 된 것이 오히려 글을 쓰는데 더 도움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옛날만큼 생각한 대로 바로바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번 더 생각해 보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글로 쓰는 작업이 훨씬 더 맘에 든다. 그러니 0개 국어 작가의 글을 읽고 있다고 무시하거나 읽기를 멈추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