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듯 낯선 곳에서
한국을 떠나서 살기 전에는 매운 음식을 꽤 잘 먹었다. 가뜩이나 위가 약하고 안 좋은 편인데 매운 음식을 먹다가 속이 너무 쓰려 약을 달고 산 적도 많았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이 내가 즐겨 먹는 이 한국의 '맛'이 무척이나 자극적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매운 거 잘 못 먹어. 신라면도 맵다니까"
한국을 떠난 지 4달쯤 되었을 때, 같이 살게 된 룸메이트 언니가 한국 마트에서 사 온 라면들을 정리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생각했다.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말 같지도 않네'라는 말이 이럴 때 나오는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 신라면이 맵다고요?'
그리고 며칠 후, 라면 봉투를 발견한 일본인 룸메이트가 이거 매운 라면 아니냐 묻길래 또 콧방귀를 뀌며 그거 하나도 안 맵다고 대답해줬다. 그러니 되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한자로 되어있는 신라면의'신'을 가리켰다.
"아, 그게... 이게 맵다는 뜻은 맞는데 신라면은 하나도 안 매워"
하지만 이 말을 후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외국에 있는 한식당들은 외국인 손님들을 위해 한국에 있는 식당들처럼 맵고, 짜고, 자극적이게 간을 하지 않는 편인데 처음엔 한국인으로서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 맛에 적응하여 꽤 자주 한식당을 찾았다. 그래도 가끔은 그 한국의 매운맛이, 먹으면 머리가 찌릿하고 입이 얼얼 해지며 눈물이 찔끔 나오는 그 매운맛이 그립곤 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엄마는 나를 위해 모든 음식의 간을 조절해야 했다. 좀 더 싱겁게 그리고 좀 덜 맵게. 한 번은 나를 너무 신경 썼는지 순두부찌개를 너무 심심하게 끓이는 바람에 아빠가 한 숟갈 떠서 먹어보고는 "아이고 이게 뭐야!"라며 인상을 찌푸렸던 적도 있었다. 참고로 아빠는 간만 맞으면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미식가와는 도통 거리가 먼 사람이다.
다행히, 특히 아빠에게 정말 다행이게도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외국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긴지라 꽤 빨리 한국의 매운맛에 적응할 수 있었다.
매운 낙지 덮밥을 밥에 슥슥 비벼 크게 한 입 먹으며 나를 무시했던 그 재수 없는 인간을 잊고, 매운 떡볶이를 입에 넣고 쫄깃쫄깃한 떡을 씹어 먹으며 나를 막 대했던 진상 손님을 잊고... 매운 음식을 먹으면 타지에서 받았던 설움, 느꼈던 외로움, 겪었던 모든 안 좋은 일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맵다는 생각밖에 할 겨를이 없어 다른 잡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는 그냥 그렇게 텅 빈 채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말로 내가 잊고 싶은 모든 기억들을 이렇게 쉽고도 맛있게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안다. 매운 음식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어느 것 하나 쉽사리 잊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결국은 시간이 약이라는 것을. 그리고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 살만 찌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외국 생활을 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기본 5킬로다. 이건 규칙이라 나만 안 찔 수가 없는 거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