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끔 겪을듯한 일이다. 운전 중에 본 차량번호 하나가 문득 옛일, 누구의 얼굴, 추억을 불러오는 일. 오살(五殺) 나게 춥다는 말이 딱 맞는, 영하 14도의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오늘 아침 내 눈에 들어온 차 번호가 '형'을 불러왔다, 보고 싶은 형, '썬'.
이십 대 중반쯤이다. 일터에서 사수로 만난 형은 밝고 환하고 젠틀한 딱 '댄디보이'였다. 도시락을 같이 먹고 당구를 치고 맥주를 마셨다. 형의 도시락엔 언제나 현미밥과 나물이 있었다. 나는 설렁탕이나 짬뽕, 육개장을 시켰다. 스물부터 당뇨가 있었다 했다. 우린 적당히 바쁘고 잘 벌고 적당히 놀았다. 형은 둘째가 막 태어났고 형이 좋다고 여러 번 말하고 함께 얘기 나눈 아내와 난 결혼을 했다. 형은 분당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했고 날 그 동네로 불렀다. 나의 고향, 먼 남녘 녹차보성과 미아리 작은 돌산에 이은 세 번째 고향 분당 태재고개는 형 덕에 생겼다.
형의 우리말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바로 해, '썬(SUN)'이다. 난 늘 그를 '써니형'이라 불렀다. 누나만 있는 나는 평생 형의 존재를 갈망했다. 지금도 그때도 작은 틈새만 보이면, 가까워지면 누구에게나 '형'과 '성'을 대기 좋아했다. 써니형은 친형같이 날 잘 대했다. 결혼도 집도 일도심지어 교회 정착조차도 많이 빚졌다. 지금 둘도 없이 가까운 '태'와 '복'도 다 써니형 덕에 알고 사귀고 친해졌다.
식구들 함께 저녁을 먹고 새벽에 둘이서 산엘 뛰어다녔고 시간 되면 대낮에 맨발 산책을 했고 형이 배우는 대체의학의 실험자도 되었고 만들어준 음식도 접했다. 틈만 나면 만나고 얘기를 했고 즐겁고 밝은 시간 속 책을 읽고 노래를 들었고 커피를 마셨다. 옅은 대로 깊은 대로 숱한 주제와 가치와 방향을 얘기했다. 신기하게도 어우러지고 보는 길이 같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흘렀다.
그리도 자주 다니던 우리들의 산길이다. 새로 이쁘게 단장된 모습이 형은 영판 낯설을게다.
언제부터인가 형은 느닷없이 종적을 감췄다 한참 후에야 나타나곤 했다. 여지없이 형을 만나고 찾아냈던 당구장과 우리 둘이 만들어 닦아둔 불곡산 능선 맨발 산책로와 영장산 속 둠벙 옆 오두막에도 형이 없었다. 그러다 열흘, 한 달 만에 불쑥 나타났다. 막걸리 병 위로 뜬 찬술 같은 말개진 얼굴과 작대기 덧댄 마른 몸뚱이를 한 채, 뭔 일 있었냐는 듯 말했다.
'밥 먹자, 너 좋아하는 고등어구이 먹자.'
몇 번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니 그것도 일이 되어 안 보이면 형이 또 어디 지방 갔나 보다 했다. 아픈 몸에 대해 말하길 싫어했다. 언제나 당뇨와 형수 얘기는 꺼내면 바로 싸매어 멀찍이 한 켠에 묻고 치워버렸다. 나의 일과 아이들과 장래와 주말에 가 볼 새로운 산을 얘기했다.
형은 점점 말랐다 살이 찼다 다시 말랐다를 반복했다. 하던 일을 줄이고 정리했다. 차를 버리고 걷거나 어찌 되어가는지 속 모를 날들 위로 가끔 털털이 작고 오래된 오토바이를 타고 오기도 했다. 말이 줄었고 성치 않은 몸들이 불쑥 신호를 보낸다 했다. 걱정할라치면 툭 털어버리고 일어섰다.
'시간 되면 산에 가자. 커피 내려왔다.'
십여 년도훨씬 전이었다.
아내랑 데이트 했던 잠실 고수부지를 아이들 데리고 자주 갔다. 그날도 한강에서 아이들과잔디밭에 앉아 치킨에 과일을 먹고 노닐던 잔잔한 주말 저녁이었다. 써니형의 딸이 전화를 했다.
"삼촌, 아빠가 죽었어요."
하늘은 그렇게 어두워졌다. 한강의 물결이 멈췄다. 신갈오거리 강남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의식을 잃고 한 달이 넘도록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다고, 더 이상은 안된다고 내보내서 작은 병원으로 왔다고, 여기 온 지 한 달 열흘이 또 지났다고, 형이 절대 병원 입원 사실 알리지 말랬다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길 바랐다고, 그래서 연락 못했다고 형수는 울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형이 타고 다니던 기아 세피아(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십여 년이 지나도 환한 얼굴 그대로 눈앞에 서 있다. 오늘 아침 춥고 눈 시린 겨울 한 복판에서 형의 진한 네이비 감청색 세피아 차의 번호 '1919' 만났다. 일구일구, '아이구아이구'도 아니고 거 참 차번호 신기하네, 그랬을 때 형이 그랬다.
"'1919'는 I go, I go 아이고우 아이고우다, 맨날 가고 매일 가고 또 가고, 좋지."
누구나 간다. 어디로든 간다. 어디까지 간다. 지리로는 칸트처럼 태어난 동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도 삶으로는 멀리 간다. 오늘도 해가 졌다. 어디로 갔다 어디로 왔는가. 길은 푸르고 잔잔히 흐르던가, 파도치는 폭풍주의보 가득이던가. 삶과 죽음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내내 가까운가.
형은 갔고 난 그 길 간다. 서두를 리 없지만 서두를 수 없지만 늦출 수도 아니 갈 수도 없는 길이다. 작고 고운 영장산 산길처럼 따사로운 길 혹은 거칠고 가파른 치악산 계단과 계곡 돌길을 오늘도 간다. 크리스마스 탄성도 쓸쓸하다. 불황과 부진의 지표가 밥벌이를 거쳐 밥상과 발걸음에 닿았다. 금방 끝날 일이 아니다. 그렇게 건너는 날들이다. 그리운 형과 형의 날과 형의 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여도 걷고 달리는 나의 날들 속에 남은 그가 남긴 향기와 소리와 발걸음 가득이다. 살아가는 순간엔 언제나 함께할 게다, 발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