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욕은 능력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던데
오른쪽 발목 통증으로 달리기를 쉰 지 정확히 2주가 됐다. 이제 대회까지는 45일 정도가 남았다. 활동 중인 마라톤 카페에서의 동료들도, 인스타그램으로 알고 지내는 친구들도 마라톤 대회 참가를 목표로 한창 운동 중이다. 지금은 풀코스에 대비해 천천히 그리고 장거리를 뛰는 훈련을 하는 시기다. 이른바 LSD (Long Slow Distance)라고 하는 천천히 오래 달리기다. 보통 하프마라톤의 21km를 넘어가는 거리로 시작해서 서서히 30km 이상으로 40km 가까이 늘려간다. 그리고 여간해서는 풀코스만큼의 42.195km를 완수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천천히 멀리 뛴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너무도 신기해서 속도와는 무관하게도 장거리를 뛸수록 그에 맞는 신체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무리가 되지 않는 속도로 천천히 풀코스에 가깝게 뛰면서 신체를 단련한다. 이 기간의 LSD 훈련이 잘 마무리되면 남은 기간은 마라톤 참가자의 목표 시간 (기록)에 따라 속도를 올려서 장거리를 뛰는 훈련으로 돌입한다. 장거리 훈련에서 속도를 올려 장거리 훈련하는 단계에서 나는 이탈됐다.
때는 설 명절을 며칠 앞둔 1월 18일이었다. 기온이 너무도 사악하게 떨어져 장거리 훈련 대신에 진행한 템포 훈련 (각 마라톤 목표 시간에 따른 페이스대로 달리는 훈련으로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들과 그룹으로 달리면서 서로를 체크하고 독려한다)에서 새 러닝화를 개시했다. 대회를 앞둔 레이싱 전용화로 바닥에 카본플레이트가 들어간 최상급 모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기를 이어가다 7km 지점에서 오른쪽 발목에 이상 징후가 감지됐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욕심으로 10km으로 뛰고 훈련이 종료된 후에 찾아온 극심한 통증, 그게 내 발목을 잡았다. 말 그대로 발목이다. 발목.
2월 1일이 되었지만 아직 발목의 통증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에는 그저 뛸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고 5km 구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되면서 10km를 뛸 수 있게 되면서 나날이 기쁨의 강도는 높아졌다. 지난 12월에 하프마라톤 대회를 참가하면서 기록이라는 잿밥에 관심이 가면서 결과는 좋았지만 한동안 왼쪽 정강이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부터 책과 자료를 찾아가며 통증과 부상에 대해 공부했고 달리기 자세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정강이 통증은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게 해결됐다는 자신감은 곧 자만감이 되었고 마라톤 풀코스 기록에 대한 낙관적인 무리수가 됐다. 그 결과 지금은 벤치 신세다.
순수하게 달리기를 즐기던 시점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오히려 달리기를 알아가면서 기록이 좋아지면 욕심이 생기고 과욕이 생긴다.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운동 장르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목표를 이뤄가는 것들, 등산이나 장거리 하이킹 스타일인데 마라톤은 장거리를 향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건 같지만 이상하게도 기록을 의식하게 만드는 종목이다. 어쩌면 나와 맞지 않는 시간적 기록 달성이라는 지향적이 정신을 압박하고 신체를 과부하시켜 부상에 시달리는 것 같다. 드라마 <대행사>에서 고아인 상무는 이렇게 말했다. '과욕은 실력은 없는 사람이 부리는 욕심'이라고 했다. 뜨끔했다.
3월 19일에 열리는 서울 동아 마라톤 대회는 꼭 참가하고 싶다. 이제는 기록보다는 부상 없이 완주를 목표로 뛰겠다는 각오로 임할 것이다. 그렇기에 통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고, 남들의 훈련과 견주어 스스로 낙담하는 감정 소모도 줄일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마음가짐은 결국 대횟날에 변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 불꽃처럼 태우고 연기처럼 사그라질 각오로 하얗게 불태울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