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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y 11. 2024

<도시의 마지막 여름>

공허한 청춘이 보내는 뜨거운 여름을 느끼고 싶다면

   어떤 소설은 이야기보다는 분위기로 말한다. 마치 주변 사람들의 삶이 비슷비슷하지만 어떤 사람이 유독 인기가 있는 이유가 스타일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영화나 그림을 말할 때도 종종 감독이나 작가의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스타일, 혹은 분위기는 그 작품을 말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이 바로 분위기로 말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젊음과 방황, 도시의 고독에 대해 말할 때 분위기를 빼고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이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 책의 서두에서 인용한 T.S. 엘리엇의 문장이 될 것이다. “그는 오르락내리락하듯이 나이와 젊음의 시기를 거치고 소용돌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 한 줄의 문장에서 ‘그’를 ‘레오 가짜라’라는 인물로 만들어 길게 늘여놓은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아마 작가가 방점을 찍고 싶었던 단어는 “젊음의 시기”와 “소용돌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젊음을 죽이고 있는 레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고 있는 곳이 ‘로마’라는 도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로마는 유럽 정신의 근간이었다가 이제는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관광 상품으로 팔아서 먹고사는 도시니까 말이다. 그리고 세계대전을 겪고 살아남은 아버지의 후손이라는 점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전쟁을 겪은 세대를 부모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은 살아남은 자들 특유의 과도한 자만심과 함께 폐허를 보았던 트라우마가 섞여 있는 복잡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식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주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으나, 자식들 입장에서는 정신적 폐허 속에서 물질적 풍요는 더 큰 공허함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우리의 영웅적인 어버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하고 유쾌한 동시에 저속한 장례 연회에 발을 들임으로써 우리들 외에 수많은 자식들을 낳았고, 그들이 바로 지금의 우리를 대신하고 있는 그 피리 반란군들 같은 자들이었다. 추악한 기억의 산물이며 도살장의 생존자들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음식에 만족하는 것뿐이었다.”(112)


   레오의 누이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럭저럭 주어진 현실에 맞춰서 잘 살아가지만, 레오와 그를 잘 이해하는 그라지아노처럼 자기 존재에 대한 예민함이 발달한 사람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불편하기만 하다. 한없이 자랑스럽기만 했던 그들의 문명이 서로를 파괴했던 기억은 그들의 부모들에게 새겨져 있고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에도 파괴의 잔재들이 남아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을 낳고 도시를 재건하고 있지만 레오와 같은 후손들에게 남은 정신적 유산은 풍요로웠던 전통이라기보다는 가볍고 천박한 렌조 부부의 모습들처럼 변질되어 버렸다. 


   채울 수 없는 허기를 채우거나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지만 레오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사랑은 아리아나인데, 그녀가 단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갖고 있는 책이 <스완네 집 쪽으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젊음과 현실적인 에바 때문에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피카소의 짝퉁 같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아리아나를 보면서 레오가 느끼는 삶에 대한 염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레오에게 위안이 되거나 진실한 삶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부모님은 이미 둘만의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레오는 과거의 삶으로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함께 시나리오를 쓰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던 그라지아노도 알코올로 인한 사고로 죽어버리고, 레오도 심각한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된다. 중독에서 빠져나온 레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시원으로 돌아가는 일뿐이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듯한 레오의 이야기가 묘하게 잘 읽히고 빠져드는 것은 결국 소설의 분위기 덕분이다. 더운 여름과 로마라는 도시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매력을 나른하게 잘 표현해서 이 소설은 잘 읽힌다. 레오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그것은 다 읽고 난 뒤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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