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던 사랑이 지나고 난 자리
1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떨리는 순간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2권은 사랑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시작하는 사랑은 환상과 기대에 가득 차 있어서 현실을 볼 수 없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사랑은 반드시 현실과 조율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권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상태가 희극이 되려면 결혼제도가 유연해져서 구속력이 약해지거나 제도 자체에 다양성이 존재하거나 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카레닌의 경우도 결혼에 대한 사회적인 압박이 없었다면, 안나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그리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을 것 같다. 어차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안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에 끼치는 영향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직 그녀가 타락하면서 그한테 튄 진창을 떨어내고 활동적이고 명예롭고 유익한 자기 삶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고 가장 점잖고 가장 이로우며, 따라서 가장 정당할까 하는 문제뿐이었다.”(85)
안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사랑의 자유를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그녀가 각성한 이후에는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만 움직일 것 같지만 그녀 또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 앞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물론 당대의 러시아 사회는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아서, 바람을 피우거나 이혼을 할 경우 여자에게 씌우는 멍에가 훨씬 무거웠다. 평생 귀족으로 살아왔던 안나가 그런 불명예를 안고 사랑 하나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는 분명히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 생활이 허위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참 의아한 일이다.
“남편의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모든 일이 이전대로 남으리라는 것과, 지위와 아들을 버리고 애인한테로 달려갈 만큼의 용기가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밀회는 역시 그녀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밀회가 둘의 상황을 일변케 하여 그녀를 구출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150)
그런데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을 들여다보면, 사랑으로 결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중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남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일상적 생활을 함께 하는 데는 언제나 하찮은 일들에도 의미를 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던 환희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랑에 대한 거대한 환상은 사라지고 자질구레하고 추레하게 보이는 현실이 남는다. 현실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함께 살아가려면 환상에서 현실로 건강하게 이동해야만 한다. 레빈과 키티는 그 과정을 성실하게 잘 수행해 가는 중이다. 레빈의 형인 니콜라이의 죽음 앞에서 키티가 보여준 모습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사회적 야망과 성공까지 포기하고 사랑에 투신한 것처럼 보이던 브론스키의 사랑도 현실에서 잘 안착하지 못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에게는 결혼제도가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둘만의 여행을 떠난 뒤 브론스키가 느끼는 이런 감정 또한 불안 요소로 작용한다.
“한편 브론스키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완전히 실현됐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 그 욕망의 실현이 자기가 기대했던 행복의 산에서 겨우 한 알의 모래를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실현은 행복이란 욕망의 실현이라느니 하며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그 영원한 착오를 그에게 드러내 보였다.”(429)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이 결국 결과가 좋지 못할 것 같은 암시가 이미 드러나 있다. 안나는 종종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의 목전에 갔다가 돌아왔지만 죽음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2권에서 짙게 드리운 죽음에의 암시는 브론스키도 심각한 총상을 입었다가 회복된 것도 그렇고, 안나의 아들인 세료자조차도 피상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걸 보면 작가가 비극적 결말에 대한 복선을 철저히 만들어 놓고 있는 것 같다.
동시에 레빈의 입을 통해서 톨스토이는 러시아적인 특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농민들의 생활을 이상화하면서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던 레빈이 점차 그들만의 모습과 기질을 긍정하는 것을 통해서 러시아 고유의 문화와 풍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독특한 특징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태도는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을 비롯한 귀족 사회와 사교계의 모습과도 자연스럽게 대비되면서, 어느 쪽이 더 삶의 본질에 가까운지, 더 진실한 삶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낙네들은 노랫소리와 함께 레빈에게 다가왔는데, 마치 환희의 천둥을 동반한 먹구름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 레빈은 이 건강한 즐거움이 부러워지고, 이러한 생의 환희의 표현 속에 참여하고 싶어졌다.”(77)
명예와 허위 때문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는 인물들을 통해서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