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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Oct 24. 2024

<안나 카레니나 3>

인간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3권의 중심인물은 아무래도 레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빈이 사냥을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질투하는 모습과 아이의 탄생, 가족을 꾸려가기 위한 경제적인 방편인 농사일, 그가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일반적이며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레빈과 키티의 생활을 중심에 놓고 안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녀의 극단적 상황과 불안과 고뇌가 더욱 짙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는 아내인 돌리에게 충실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무심하다. 돌리 입장에서 보면 안나의 선택과 감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너무 쉽게 남편의 외도를 용서한 것 같아서 후회하면서도 돌리는 안나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안나를 비난한다. 어째서일까? 도대체 내가 더 나은 게 무엇일까? 나에게는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 내가 바라는 대로는 아닐지언정, 아무튼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안나는 자기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것이 왜 나쁘다는 것일까? 그녀는 살고 싶어 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에 그러한 마음을 심어놓은 것이다. 나라도 틀림없이 똑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113)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을 떠났고, 사랑하는 사람인 브론스키와의 삶을 선택한 것을 살기 위해서 한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미 경험했던 돌리는 안나를 쉽게 단죄하지 않고 인간적인 관점으로 품는다. 하지만 안나는 브론스키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행복할 수가 없다. 


   브론스키는 사회적 관계들을 계속 이어갈 수 있지만, 안나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아주 한정적인 관계들로 둘러싸인 시골에서나 생활이 가능하게 되어버렸고 그런 생활은 금방 한계를 보여준다. 안나에게 사회적 단죄의 기준이 더 높다는 것은 레빈과 키티의 반응으로도 알 수 있다. 레빈은 실제로 안나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지만, 키티는 안나에 대해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부정한 여자로 이미 낙인이 찍힌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키티가 앞으로 레빈과 보여주려는 정상적 부부의 삶에서는 허락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블론스키도 그렇고 체첸스키 공작을 비롯한 남자 귀족들의 삶에서는 안나가 한 선택과 같은 것들이 큰 제약이 되지 않는다. 


  “스테판 아르카디치는 그 말이 허풍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지바호프는 삼십만의 빚을 지고 있고 남에게 베풀 일 코페이카도 없는 주제이지만 역시 까딱없이 살고 있다. 잘만 살아가고 있다! 또 크리프초프 백작은 이미 오래전에 사회에서 매장돼버렸으나 여전히 여자를 둘이나 거느리고 있다.”(335) 


   고립되어 버린 안나는 모르핀에 의존하다 아편까지 하게 된다. 불안이 극심해지면서 이성적으로는 사고할 수 없게 되고 브론스키에게 집착하다가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안나의 선택은 레빈의 삶과 대비되어서 개인적 사랑은 결코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서 레빈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앞에서도 혐오감과 당혹감을 먼저 느끼며 근본적 존재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내뿐 아니라 아들 앞에서도 자신을 구원해 주는 무조건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레빈은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없어서 절망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자문하는 것을 그쳤을 때는 마치 자기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449)


   결국 레빈의 깨달음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 그 알 수 없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에 도달한 것이었고, 그것으로 평온과 의미를 얻는다. 안나와 레빈의 삶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의 의미를 확장해서 거대 선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 같다. 안나의 삶은 당시 사회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개인적 사랑에 함몰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를 보여준다고 한다면, 레빈의 삶은 귀족으로서 농민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비롯해서 선한 가치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의 사랑의 실천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의미를 축소하기에는 안나의 열정과 선택이 주는 울림이 너무 크다고 본다.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만남을 통해서 카레닌과의 사이에서 사랑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동안의 삶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인간이다. 프랑스 영매가 말하는 것을 믿고 이혼을 해주지 않는 카레닌의 결정과 사교계의 냉대가 아니었다면 안나는 그런 병적인 상태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안나가 다른 시대에 다른 공간에서 사랑했다면, 보다 나은 형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안나를 통해 사랑과 욕망, 개인과 사회의 갈등, 당대 사회의 한계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레빈을 통해서는 농노제의 붕괴 이후 귀족들의 고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 등을 보여준다. 레빈의 입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너무 지루하게 늘어놓지만 않았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당대 인물들의 다양한 면모와 뛰어난 자연 묘사, 섬세한 내면 묘사 등을 통해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처럼 인간에 대해 넓고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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