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 미술 특별전'에 다녀왔다.
별세한 이건희 회장이 기증했다는 미술작품을 순회하면서 전시하는 행사가 내가 사는 부산에도 오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언론에서도 삼성가의 수집품을 이건희 회장이 별세하면서 모든 국민들이 볼 수 있도록 기증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개막하는 첫째 날 바로 찾아갔다.
과연 많은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100여 점이 좀 넘을까? 주로 광복 이후로 8~90년대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유명 작가들의 미술품들이었다.
(이건희 컬렉션에 전시된 한국 근현대 미술작품들)
그중에서도 한 두 작품 정도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첫 번째 작품은 바로 이 작품이다.
(이용우-삼고초려, 1950년대)
사진이 좀 작게 나와서 아쉽긴 하지만 이용우 작가의 '삼고초려'라는 1950년대 작품이다. 삼국지의 삼고초려 부분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이지만 이 그림을 보자마자 그때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내 눈엔 먼저 장비의 불툭 튀어나온 입술이 보였다. 안 그래도 대춧빛인 관우의 얼굴이 더욱 붉게 표현된 것과 함께... 둘은 겉으로는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저 쌘님 따위가 우리 형님을 뭘로 보고...'라고 하는,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외모는 집안에 앉아있는 제갈공명과 비교해 작게 그려진 것도 재미있다. 장비의 왼손에 건들거리듯 땅을 짚고 있는 그의 칼도... 장비는 '장팔사모'라고 불리는 긴 창을 주로 들고 다니며 썼다고 삼국지에는 나오는데 무려 1장 8척(지금 기준으로 6m 정도~^^;;)이라는 그 긴 창은 어디 가고 동네 건달들이 들고 다닐 법한 조그만 칼을 땅에 짚고 건들거리는 모습이라니...ㅎ~
거기에 비해 안방에 앉은 제갈량의 모습은 기품이 넘친다. 무(武)에 비해 문(文)을 숭상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난 듯하다. 그는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통천관을 쓰고 왼손에는 깃털 부채인 백우선을 쥐고 잠깐 조는 듯,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다. 관우와 장비의 형님인 유비가 댓돌 아래 마당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매사 다혈질인 장비와 또 당시의 강직하기로 소문난 관우가 보기에 정말 눈꼴 시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성질 같아서는 들어가서 저 제갈량인지 제길량인지를 한번 뒤집어엎고 싶지만 큰 형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런 제갈량의 집 문 앞을 지키는 이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한 마리 학이다. 유비를 안내하고 있는 소년 동자의 키쯤 되는 조그만 학이 마치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마냥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다. 학은 초야에 묻힌 선비, 혹은 신선을 상징한다. 너희 같은 불량배, 건달들은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는 듯 그 집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제갈량의 높은 학문과 인격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가 오른쪽 팔꿈치를 괴고 있는 두꺼운 책들과 뒤편 책꽂이에 놓인 책들, 그리고 방 안의 난초에서도 그의 높은 학문과 청초한 성격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림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수석 수준의 암석과 집 앞 조그만 언덕과 집 뒤편의 소나무와 분재 수준의 나무들에게서도 그의 절개와 기품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도 유비였으니 만나주었지, 제갈량은 다른 시답잖은 군주들에게는 그 자취도 보여주지 않았을 만큼 시류에 물들기 싫어하는 성격의 은둔 거사였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유비도 깍듯하게 예를 갖춰 제갈량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삼고초려'의 예를 다하고 있고 멀리 뒤편에는 의형제 삼 형제가 타고 온 말들이 나무에 묶여있는 것이 보인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몇 번씩이나 상상했던 '삼고초려'의 장면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청룡언월도와 장팔사모를 들고 무력시위하면 어쩌나 하고 상상했던 그 장면을 작가는 상대적으로 큰 제갈량의 모습에 비해 유비, 관우, 장비의 모습을 축소하는 것으로 해서 무리 없이 그리고 있었다. 나는 무릎을 '탁'쳤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보이는 육체의 크기가 아닌, 보이지 않는 정신의 크기, 학문의 크기로 주인공들의 배열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보이지 않는 '한수'였던 것이다.
(조우)
위 그림은 나를 한참 동안이나 그 앞에 서 있게 만들었던 그림이다. 제목은 '조우'라고 확실하게 본 것 같은데 작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옆에 있는 설명서?를 같이 찍으면 되겠지 하고 여백까지 주어 사진을 찍었는데 집에 와서 확대해 보니 화소가 작아 글씨가 뭉개져 무슨 글씨인지 알 수 없었다. -작가를 알고 계신 분께서는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쨌든 다른 추상화들과 마찬가지로 슥~보고 지나치려는데-이건희 컬렉션에는 7~80년대의 추상화가 많았는데 어릴 때부터 느낀 거지만 대가들의 추상화 작품은 자세한 설명이 없이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온통 노랗게 칠한 그림에서 검은 공 하나가 '딱' 보였다. 마치 개기일식을 맞은 태양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 공인지, 태양인지를 보고 있는 맞은편의 실루엣, 초등학생쯤 되는 남자아이 같다. 그 남자아이는 공인지 태양인지를 보고 기쁜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다. -물론 얼굴 표정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나의 상상이다.- 그래, 이게 바로 조우구나~ 내 입에서는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순간, 아이로 말하면 공을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조우인 것이다. 우리가 가장 만나고 싶은 존재, 새로운 세계로 빠져드는 그 순간 우리는 최고의 희열의 맛본다. 그림은 온통 덧칠하고 있는 노란색은 그 희열의 순간을 나타내는 색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을 '조우'라고 이름 붙였다. 난 다시 무릎을 '탁'쳤다. -물론 실제로 친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는 그 짧은 순간을 잡아내는 타이밍이 이렇게도 절묘할 수 있다니...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남기신 작가님의 성함을 알아오지 못한 것은 그날 나의 최대의 실수가 아닐 수 없다.~ㅠㅠ- 자신이 기대했던 순간, 만나고 싶었던 존재와의 만남이 올올이 붓끝의 터치로 말미암아 하나하나의 에너지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작품들을 그 오랜 시간 동안 한 개인의 소유 아래서 그 사람과 친한 몇몇 사람만 누렸다면 정말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 될 뻔했다. 일반인들도 이런 좋은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고 힐링을 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번 삼성가의 이건희 컬렉션 사회환원은 조금 늦긴 했지만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의 창고에서 몇몇 사람들만 누리게 되면 그것이 어떤 보화든, 보석이든, 재물이든, 그 밖에 귀중한 것이라고 해도 결국은 썩고 문드러져 곰팡내를 풍기며 세월에 사그려져 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와서 건강한 햇살 아래서 다수의 국민들과 일반인의 눈에 비칠 때, 그들의 영혼에 울림을 줄 때, 처음 작가가 상상한 그 메시지와 영감을 전달하라는 그 사명을 다할 때, 그것들은 은행에 있는 돈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져 더 큰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제일 앞 대문 사진에 걸린 '욕망의 불꽃'이란 작품은 비록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번 전시의 타이틀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한 개인의 욕망이 불길처럼 타오르면 그 주위의 모든 것들을 불태운다는 의미이다. 그 욕망은 재물도, 미술작품도, 사회의 공공복리도, 더 나아가서는 그 주위의 사람들까지 불태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기 전에 그런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미술품을 사회에 환원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눔을 실천한 이번 삼성가의 결정에 두 팔 벌려 '조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