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의 너>
여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년 소녀가 있다. 마땅히 의지할 수 있는 어른 없이 삶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소년과 소녀. 둘의 만남은 낭만이 되고, 사랑이 된다.
소녀는 미래만을 바라보며 산다. 그녀에게 현재란 없다. 오직 미래만 있을 뿐.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을 가면 낙원이 펼쳐질 거란 세상의 세뇌를 오랫동안 듣고 살아온 탓이다. 때문에 당장의 학교폭력이, 마음의 괴로움이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견디어낸다.
반면 소년에겐 지금밖에 없다. 당장의 미래조차도 어떻게 될 지 모른다. 그냥 근근이, 당장의 오늘을 어떻게 살 지가 소년에겐 급선무일 뿐. 딱히 처절하지도, 원하는 게 있지도 않은 소년은 어느 날 소녀를 만나 처음으로 원하는 게 생긴다. 바로 좋아하는 사람의 행복과 안온한 삶.
현재의 행복을 미루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아픔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은 진짜 삶이 아니다. 그러한 삶은 끝내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 사회가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방식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통감했다. 사회가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규범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옳지 않다고, 틀렸다고 규정하고, 오롯이 그 규정 속에 아이들을 가두기 위해 당장의 고통을 외면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정작 이상한 건 아이들이 아닌 사회라는 것을, 영화는 내내 이야기한다.
어떻게 지금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중이 행복할 것이라 자신할 수 있나?
이상적인 루트를 강요받고 그 길을 충실히 따라온 입장에서, 나는 여전히 자신할 수 없다. 사회는 여전히 좋은 학벌과 직장을 우상화하고 나에게 지어지는 수많은 이름들은 아주 조금은 달콤하다. 어쩌면 나 역시도 보상 심리 같은 마음을 조금은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늘 자문한다.
내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게 누군가가 나를 낮추어 부르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폄하할 수 있는 이유가 될까. 원하는 게 달라서 다른 길을 택했다면 그 또한 존중받아 마땅한 일인데, 우리는 아주 쉽게 규범 밖의 길을 걷는 이들을 멸시할 때가 있다. 애초에 그 규범이란 것도, 내가 원해서 정해진 게 아닌데 말이다.
규범 밖의 길을 걷는 것에 유연해져야 한다. 다양한 시도와 실패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아픈 사회가 아픈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기에, 사회가 다양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된다면, 사회가 말하는 아픈 사람들 또한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또, 현재의 아픔을 외면하며 기약 없는 미래만을 바라보며 사는 아이들이 줄어들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 지금의 내가 꿈꾸고 바라는 것을 직면해야 미래의 나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는 거다. 고작 바람직한 학생으로 살아가기 위해 원하는 것을 늦게 발견하게 된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아직 어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다가올 기약 없는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현재를 살아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