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과장

4화

by 노이망



빈 쟁반을 들고 돌아 나오는 복도 뒤로 사장이 회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고서는 문 닫히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 걸까. 혹시 사장이 갑자기 회사로 들어오게 된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사장은 창립주이고 회장은 8년 전 회사부도 위기에 영입된 사장의 직장 선배다. 회장 부임 후 회사는 매년 급성장하며 복지가 좋아졌고, 4년 만에 코스닥에 상장도 했다. 그런데 사장이 주식지분을 늘리려다 발각되면서 둘의 사이가 급격하게 어색해졌고, 회장은 바지 회장이 되었다 카더라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최종 결재권은 늘 사장이 행사했고, 회장까지 결재가 올라가더라도 그것은 보고로 포장된 통보인 경우가 허다했으니 그 소문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이 소문을 듣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았다. 회장의 보직 이동 약속이 허상이었음을.




탕비실 정수기 위에 쟁반을 올려두고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없는 손으로 샌드위치 껍질을 벗기자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리며 사장의 수행비서 박 과장이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어쩌다가 점심을 못 먹고.”


내가 별 말이 없자 그는 비어있는 내 옆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단 모른 척.


“그런데 사장님은 갑자기 왜 들어오신 거예요?”


“글쎄요.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어요.”


박 과장은 사장이 여기저기 휘갈겨놓은 꼬깃꼬깃한 스케줄표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수정하고 두 장 뽑아주세요.”


건네받은 스케줄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비어있던 내일의 일정이 부산이라는 글자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사장 없는 금요일만큼 불타는 금요일이 또 있을까. 아직도 노트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휴대폰을 옆으로 치우고 스케줄표 파일을 열어 꼼꼼히 수정했다. 세 장을 뽑아 두 장은 박 과장에게 주고 한 장은 내 책상 위에 깔아 두는 찰나, 박 과장이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떠들어댈 준비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박 과장의 한숨을 재차 무시하고 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사장님. 또 번거로운 일로 전화합니다. 혹시 이번 주 토요일 그린 CC나 골드 CC 8 시대 한 팀 구할 수 있을까요?”


“블루 CC는 안될까요, 유진 씨? 블루 CC는 8시 16분, 제일 좋은 시간대 하나 가지고 있어요. 지금 바로 문자 넣어 드릴 수 있습니다.”


“사장님이 블루 CC는 쓰시고 싶지 않다고 하시네요.”


“그러면 어렵습니다. 최소 일주일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볼 수 있을 텐데, 당장 내일모레니까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죠. 알고 있는데, 혹시나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사장님께 블루 CC라도 쓰실지 한번 확인해 보고 문자 넣어드리겠습니다.”


“네, 유진 씨. 유진 씨가 수고 많아요. 2주 전에 미리 말씀해 주시면 무조건 잡아드릴 수 있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사장에게 또 안 된다고 말해야 할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 정말 피곤하다.


“뭐예요. 골프예요?”


박 과장이 물었다.


“네. 이번 주 토요일 쓰고 싶다고 말씀하시네요.”


“휴... 오래간만에 토요일 좀 쉬나 싶었는데.”


“안 된다고 말씀드려야 해요. 남는 시간대가 없네요.”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입안에 쑤셔 넣고 박 과장에게 물었다.


“오늘은 별일 없으셨어요?”


박 과장은 재킷 안 주머니에서 두툼한 영수증 꾸러미를 꺼내어 그중 맥도널드에서 사용한 영수증 한 장을 골라 내게 건넸다.


“또 새벽에 퇴근했어요.”


영수증의 시간은 오늘 새벽 4시 26분이라고 찍혀있었다.


“죽겠어요. 오늘 지각했거든요. 새벽에 사장님 모셔다 드리고, 사장님 댁 주차장에 주차해 두고, 차 안 정리하고, 배고파서 근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사 먹고, 제 차로 우리 집 주차장에 도착하니까 새벽 다섯 시더라고요. 너무 피곤해서 주차하자마자 운전석에서 졸았어요. 우리 집사람이 여러 번 전화해서 겨우 깼지 아니었으면 계속 차에서 잤겠죠.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는데 놀래서 눈 떠보니까 9 시인 거예요. 일어나서 사장님께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데 안 받으시길래 얼른 준비하고 사장님 댁으로 갔죠. 그런데 아파트 입구에서 차 끌고 나오는 사장님이랑 딱 만난 거예요.”


사장은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다.


“창문을 열더니 정신 나간 새끼, 미친놈, 잘해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냐면서 사표 쓰라고 소리 지르시고는 가버리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 취급도 안 하세요. 잘못한 거 압니다. 그런데 너무 속상합니다. 아까 사장님 기다리면서 올해 쉰 날을 계산해 봤어요. 1월부터 지금 10월까지 주말에 쉰 거 열 손가락 안에 꼽더라고요. 자정 이전에 퇴근한 적도 몇 번 안 되고요. 유진 씨는 알죠? 영수증에 나와 있으니까.”


사장은 대외적으로 젊은 나이에 성공한 겸손하고도 호탕한 사람이었지만, 나와 박 과장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분대로 대했고, 앞뒤 안 맞는 말로 자주 몰아세웠으며, 인격적 무시는 습관적으로 했다. 전형적인 졸부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끼리끼리라고 사장과 자주 어울려 다니는 모 대기업 임원은 얼마 전 기내 승무원 폭행 사건으로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사장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한 번 툭 친 게 어떻게 폭행이냐며 내게 한참을 떠들기도 했으니까. 나는 그런 인격을 가진 최고 권위자의 무례를 견디는 압박감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박 과장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집사람은 집사람대로 너무하다 얘기하지,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지, 그만두지도 못하고 갈 곳도 없고, 돈도 없고, 참 힘듭니다.”




박 과장은 현재 아내와 딸 둘 그리고 치매가 있는 아버지를 혼자 먹여 살리고 있는 가장이다. 한때 그는 정계와 연관이 깊은 어떤 유명 기업에서 꽤 많은 연봉을 받고 일하던 수행비서였는데, 호기롭게 퇴사하고 받은 퇴직금으로 유기농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아픈 경험이 있었다. 여기가 그렇게 힘들면서도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건 누구나 그렇듯 돈 때문이었다. 아주 많은 연봉을 받는 건 아니어도 지금 받는 연봉 수준을 유지하며 이직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는 딸린 가족과 딸린 사정이 많았다.


그에 비해 나는 딸린 사정이 하나도 없음에도 이직을 생각하면 늘 두려웠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사실상 누군가의 뒤치다꺼리가 업무 전부인 이 비서 경력으로 만족스럽게 이직할 수 있는 회사가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봉을 낮춰 새로운 일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엔 여자 스물아홉은 남자 스물아홉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각했기에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박 과장이 다시 입을 열 찰나 회장실에서 걸려오는 내선전화가 울렸다.


“네, 회장님.”


“김 과장 들어오라고 해라.”


“네, 알겠습니다.”


내선전화를 끊자마자 아래층에서 놀고 있는 김 과장에게 회장이 찾는다는 문자를 보냈다. 김 과장은 박 과장보다 두 살이 많은 회장의 수행비서다.

박 과장은 하고 싶은 푸념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듯했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사정은 딱하지만 박 과장은 받아줄수록 너무 많은 말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되었을 때 반드시 선을 그어야 했다.


“박 과장님. 영수증 주세요.”




건네받은 두툼한 영수증 꾸러미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ERP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싸롱 160만 원 / 사장 / A바이어 접대비.

맥도널드 5천 원 / 박 과장 / 야식대.

명품샵 380만 원 / 사장 / B바이어 선물.

돼지국밥 6천 원 / 박 과장 / 중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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