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마 그건 원숭이와의 성교로 시작된 건 아닐 겁니다.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에 의해 감염되는 에이즈(AIDS)라는 병은 1980년대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프레디 머큐리를 포함한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천천히 면역결핍을 유발하며 완치가 안 되는 무서운 병으로 알려져 있죠. 에이즈의 전염 방식과 세기말에 등장했다는 시간적 배경이 맞물려, 방종한 인류를 벌주기 위한 신의 분노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행히도 치료법이 많이 발전해 약을 챙겨 먹으면 전파력을 아예 상실하고 건강관리만 하면 보통 사람과 똑같이 살 수 있는 만성 질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병은 우리 인류의 눈앞에 워낙 갑자기 나타난 질병이라 그 기원에 대한 다양한 썰들이 있습니다. 원숭이와 인간 간의 성관계로 처음 전파되었다는 도시전설도 있을 정도죠.
현재로서는 이 HIV가 아프리카 콩고에 살던 침팬지로부터 옮아 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미 지구상에는 고양이 면역결핍 바이러스(FIV), 유인원 면역결핍 바이러스(SIV) 등 다양한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있는데 사람 면역결핍 바이러스는 그중 한 종류일 뿐입니다. SIV는 원래 콩고와 카메룬의 국경지대에 사는 침팬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토착 질병이었습니다. SIV가 우연한 기회에 사람으로 옮겨진 다음 돌연변이를 통해 HIV로 바뀐 것이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다들 별일 없이 살다가 갑자기 1980년대에 들어서야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 시작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원숭이 몸에서만 사는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로까지 발전했을까요? 그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의 벨기에령 콩고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예로부터 원숭이를 사냥해 먹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콩고 강의 상류, 카메룬과 콩고의 국경 지대에 살던 한 원숭이 사냥꾼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냥꾼의 몸에는 억센 정글 생활에서 비롯된 상처가 있었습니다. 1908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원숭이를 잡았습니다. 사냥 과정에서 원숭이의 피가 튀었겠지요. 운 없게도 그 원숭이는 해당 지역에서 유행하던 SIV에 감염돼 있었습니다. 원숭이의 피가 상처 속으로 들어갑니다. 대부분의 병원균은 자기가 원래 살던 종류의 동물의 몸속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몸에 들어간 원숭이 면역결핍 바이러스는 대부분 사멸합니다. 하지만 일부는 돌연변이를 거쳐 사람의 몸에 적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냥꾼의 몸에 들어간 SIV는 사람의 몸에도 살 수 있는 돌연변이 SIV였고(이제는 HIV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첫 번째 에이즈 환자가 됩니다.
한 명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눈에 띄게 대유행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에이즈란 병이 10년 이상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는 침묵의 병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질병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이 병이 아프리카 야생의 밀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거기 사는 누군가가 에이즈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도 그냥 몸이 약해서 풍토병에 걸려 죽었나 보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죠. 따라서 그는 자신도 모른 채 일생 동안 몇 명의 여성들에게 HIV를 전파합니다. HIV를 받은 사람은 그의 아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내가 아닌 또 다른 여자일 수도 있겠죠. 그 여자를 만난 또 다른 남자가 감염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깊은 밀림 속 마을 구성원들에게 HIV는 천천히 퍼져 갑니다.
그 마을에 살던 한 감염자 남성이 콩고 강을 타고 내려와 하류에 위치한 대도시인 레오폴드빌(지금의 킨샤사)에 정착합니다. 대도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아내와 몇몇 다른 여자에게 HIV를 전파합니다. 그에게서 HIV를 전해받은 여자는 또 다른 남자에게 HIV를 알음알음 전파하며 소규모의 발생을 일으킵니다. 물론 이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어떤 병에 걸려 있고 어떤 병을 전파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HIV가 아프리카 한 지역의 토착 질병으로만 남아있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일련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1930년대 당시 서아프리카 지방에서는 전염병 퇴치를 위해 다양한 공중보건 사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수면병, 말라리아, 나병 등 다양한 풍토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는데 대부분의 치료약은 정맥으로 주사했습니다.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모든 주사기는 재사용되었습니다. 정맥 주사기는 1차 대전 이후까지만 해도 장인이 대장간에서 두드려서 만들던 물건이라 품귀 현상이 심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일회 사용 후 가압 멸균해야 했지만 현지 사정상 그럴 수가 없어서 대충 알코올에 담갔다 물로 씻어 쓰는 등 비위생적이기 짝이 없었습니다. HIV 감염자를 찔렀던 주사기로 남을 또 찌르고... 이를 통해 얼마나 광범위한 전파가 이루어졌을까요. 기록을 보면 1937년 한 해 동안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에서는 수면병 환자에게 588086번의 주사가 이루어졌고 식민지 시기를 통틀어서는 무려 390만 건의 주사치료가 시행되었으며 도시에서는 매독과 임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연간 47000건의 주사가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 사이에 얼마나 대대적인 전파가 일어났을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게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주민들에게 HIV를 잔뜩 퍼뜨려 놓은 다음, 1960년 벨기에 식민정부는 콩고를 버려두고 한순간에 모두들 본국으로 떠나 버립니다. 이들은 식민지인들에게 절대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겨진 콩고에는 넓은 땅덩어리를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이 전무했습니다. 따라서 유네스코에서는 많은 교사, 변호사, 공학자, 기술자 등을 모집했는데요. 여기 지원한 상당수가 중남미의 섬나라인 아이티 출신이었습니다. 아이티는 콩고와 마찬가지로 불어가 공용어였으며, 아이티의 엘리트들은 파파 독 뒤발리에 대통령의 독재 치하에서 일할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콩고로 떠납니다.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1960년대에 콩고에서 일합니다. 콩고에서 대충의 혼란기가 가시고 독재자 모부투 대통령이 집권하자 아이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들 중 한 명이 몸속에 HIV를 보유한 채로요.
여기서 잠시, 에이즈는 4H 질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요. 에이즈의 원인을 잘 모르던 80년대에 Homosexual(동성애자), Hemophiliac(혈우병 환자), Haitians(아이티 사람), Heroin(마약 중독자)들에서 집중적으로 발병 사례가 보고됐기 때문이죠. 그 정도로 아이티는 에이즈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나라이며 지금도 카리브해 연안에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콩고에서만 유행하던 에이즈는 아이티로 건너가 또 하나의 눈에 띄지 않는 대유행을 일으킵니다. 사람의 피는 혈구와 혈장으로 구분됩니다. 원심분리를 했을 때 빨간색으로 가라앉는 세포 부분이 혈구이며, 응고인자, 단백질 등이 들어 있는 노란 액체 부분이 혈장이죠. 혈우병, 백혈병 등 응고인자가 부족하여 출혈이 멎지 않는 환자들은 주기적으로 혈장을 수혈받는데요, 1970년대는 이런 냉동혈장 수요가 크게 늘어나던 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사업을 구상한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헌혈은 적어도 2개월을 기다려야 한 번씩 할 수 있지만 혈장은 일주일마다 한 번씩 빼낼 수 있습니다. 기증자와 중개자 입장에서 헌혈보다 훨씬 돈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아이티에는 '매혈'이 성행했습니다. 1972년 한 혈장 매매 업체는 약 5~6천 리터의 냉동 혈장을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혈액을 판 사람은 리터당 2달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2달러에 그치지 않고 참혹했는데요, 혈장을 판 아이티인 중에 HIV에 감염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피가 통과한 혈장분리교환 기계를 통해 수많은 혈장 판매자들에게 HIV가 전염되고 만 것이죠. HIV는 워낙 작아 혈장교환 기계의 필터로 걸러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헌혈 전 필수적으로 HIV, B형 간염, 매독 등 다양한 검사를 먼저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감염된 혈장은 다양한 곳으로 팔려나갑니다. 이 혈장을 수혈받은 혈우병 환자들은 HIV에 그대로 감염되고 맙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4H의 한 구성원이 되죠. 또, 아이티는 미국인들이 성 관광(sex tourism)을 자주 가던 곳인데, 아이티에서 성매매를 하고 돌아온 미국인들이 본국에서 HIV를 퍼뜨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HIV는 미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1980년 가을 UCLA에서 최초의 AIDS 환자가 보고되기 전부터 이미 HIV는 미국 사회 깊숙이 자리 잡아 있던 것입니다.
후에 과학자들은 각국에서 발견되는 HIV 유전체를 계통유전학적으로 분석합니다. 바이러스는 복제할 때마다 돌연변이에 의해 조금씩 유전체가 바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얻은 검체 간의 유전체 차이를 분석하면 첫 전파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이만큼의 차이가 관찰될 수 있을지 역산할 수 있습니다. 가장 흔히 발견되는 HIV 균주인 'M군 아형 B'를 분석하자 놀라운 결과가 보고됩니다. 전 세계에서 채취한 M군 아형 B의 유전체가 전부 다 아이티에서 발원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죠. 이 말인즉슨, 단 한 명의 사람이 1966년 콩고에서 옮겨온 HIV 바이러스가 아이티에서 유행을 일으켰고, 이 아이티에서 일으킨 유행에서 단 한 사람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에이즈 쇼크를 유발했다는 뜻입니다. 사람 한 명이 전 세계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입니다.
지금 날로 기세를 더해가는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똑같은 방식의 계통분석학적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누가 어디서 코로나를 가져다가 신천지에 전해준 것인지 시퀀싱을 통해 추적 중인데, 조만간 한국에 대유행이 일어난 전파 경로가 나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요즘 시대의 탐정은 돋보기와 담뱃대가 아닌 유전자 분석 기계와 수학적 도구를 가지고 일한다는 점, 신기하죠.
1. 먼 옛날부터 침팬지가 갖고 있던 풍토병이라면, 왜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하필 1980년에 에이즈 대유행이 터진 것인가요?
전염병은 일정 수준 인구밀도 이하인 경우에는 아무런 방역대책이 없이 가만히 있어도 소멸합니다. 누군가가 신종 질병에 걸려 와도 그 병을 옮겨 받을 이웃 주민이 없으면 유행의 시작조차 불가능하죠. 원래 브라자빌 같은 나름 대도시마저도 19세기에는 6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6천 명의 인구 규모로는 대유행을 일으킬 순 없었습니다. 벨기에의 식민통치 이후에 레오폴드빌이나 브라자빌 등지의 인구가 늘기 시작해 10만 명 단위가 되었고, 따라서 이때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서로 HIV를 옮기며 병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 미국까지 전파된 것이죠. 실제로 6~70년대에도 정체불명의 면역결핍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고된 바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병인지 몰랐지만요.
2. HIV가 콩고공화국과 카메룬 접경지대에서 시작되었단 것은 어떻게 알아냈나요?
HIV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겠죠. HIV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HIV와 가장 유전학적으로 비슷한 바이러스를 조사한 결과, 연구자들은 SIVcpz라는 침팬지 면역결핍 바이러스를 찾아냅니다. 이 바이러스는 야생에서는 특정 종류의 침팬지에서만 발견되는데, 그 침팬지가 오직 콩고공화국과 카메룬 접경지대에만 살고 있습니다.
3. 하필이면 딱 1908년에 인간으로의 첫 전파가 일어난 것을 어떻게 알아냈나요?
1959, 60년에 면역결핍으로 죽었다고 기록된 사망자 두 명에서 채취한 검체 2개를 위에서 말한 계통유전학적으로 분석해 보니 바이러스 유전형이 상당히 달랐다고 합니다. 얼마나 달랐는지 분석해 본 결과 적어도 첫 인간 감염으로부터 50년은 있어야 이만큼의 유전자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는데요, 이를 통해 1959년의 50년 전인 약 1908년에 첫 전파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데이비드 콰먼, 강병철 역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