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는 데만 네 시간 이상 걸리는 등산길은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앞사람이 걸어서 나도 걸었을 뿐이었다. 운동복 바지 끝자락과 스니커즈에는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달라붙은 눈이 어느새 뭉쳐 있었다. 나는 얇은 티셔츠 한 장에 후드티와 오리털 패딩만 입고 “내가 미쳤지. 미쳤어”라며 계속 투덜거렸다.
뒤따라오는 재은이를 한 번씩 돌아볼 때면 재은이는 패딩 주머니에 있는 초콜릿을 까먹고, 사탕도 까먹고 있었다. 내가 힐끔거리며 웃었더니 재은이는 입안에 있는 것을 마저 오물거리며 “살, 살기 위해서 먹는 거야!”라며 민망해했다. 몸에서는 분명 땀이 났는데도 거친 바람이 한 번 훑고 지나가면 더 추워졌다. 재은이는 안 되겠다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틀었다. 나는 나란히 서서 한쪽 이어폰을 오른쪽 귀에 꽂았다. 우리는 함께 음악을 들으며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등산길을 천천히 올랐다.
이미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걸음이 다른 리듬으로 바뀐 건 중경삼림의 배경음악 때문이었다. 그중 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을 들으며 우리는 조금이나마 흥얼거렸다. 고등학교 때 두 시간짜리 영화가 지루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도망치게 했던 것처럼 기타를 튕기며 시작하는 노래는 춥고 춥고 너무 추워서 죽을 것 같은 우리를 버티게 했다.
재은이와 나는 정상까지 올라갔지만 그곳에서 일출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털장갑과 목도리, 두툼한 스웨터를 몇 겹씩 껴입은 수백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어두운 하늘만 보며 떨고 있었다. 참다못한 나는 “일출을 보는 게 중요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대. 이 중 한 사람쯤은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겠지!”라며 쏘아붙였지만 목소리는 강풍에 날려 말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자 재은이는 “한나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나 진짜 발가락이 얼어가고 있어”라며 울먹였다.
학창 시절 가장 가까웠던 재은이는 성인이 되면서 서서히 멀어졌다. 각자의 관심사가 달라지고 속한 사회가 달라지면서 우리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겼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술에 가까워졌다. 남자들을 만났고 정당 활동을 잠깐 하다 때려치웠고 춤을 추러 다녔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행을 다녔고 한때는 단편 영화를 찍었지만 사회복지 기관에서 일했다. 재은이는 커피를 배웠고 남자를 만났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행을 다녔고 그림을 그렸고 영상 편집 일을 했다.
우리는 비슷하지만 미세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 나는 방학 때마다 아시아의 나라들로 툭하면 떠났고 재은이는 아시아의 몇 군데와 미국에 갔다. 재은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서로의 연애 방식이 달라서인지는 몰라도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 모든 일상을 나누기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사춘기 때의 고민들.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삶이란 무엇인지,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 내 안에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던 답답함과 외로움을 털어내며 우리는 서로를 돌보며 자랐다. 한때는 미지근했고 한때는 광기에 가까워서 뭔지도 모를 고민을 말할 수 있었기에 재은이는 친구보다 더 깊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이 작품은 6월 17일, 독립출판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책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