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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Dec 10. 2023

내가 만난 포켓몬 같은 베트남 연하남

[제12편] 하노이 출장 중 예기치 못한 로맨스


요즘 글을 쓰는 데 좀 조심스럽다.

생각해보니 역으로 누군가 '한국 연상녀'와의 만남후기를 쓰면 거북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최대한 국적을 중심으로 말하지 않고,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꾸리고 싶다. 그럼에도 국적이 인물에 주는 영향이 너무 막대하다보니 결국 "베트남"을 포함하게 됐는데.. 필자의 개인적 경험으로 독자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일반화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냥 아,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가볍게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장 중 예기치 못한 로맨스

필자가 일하는 기관의 하노이 지부


필자가 일하는 곳은 하노이와 호치민 두 곳에 오피스가 있다. 대부분은 하노이에서 근무하고 필자가 속한 파트너십 팀만 따로 낙동강 오리알인데 그러다보니 가끔씩 하노이 지부로 출장을 가게 된다. 첫 번째 출장 때는 워낙 시니어 직원들한테 인사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두 번째 출장 때 이번 편의 주인공인 베트남 포켓몬남을 만나게 됐다. 그렇다 그는 같은 회사 직원이다.


세미나를 듣기 위해 한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때였다. 기존에 있는 하노이 직원들과는 달리 회의실이며 환경이 낯설어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고 있을 때 포켓몬남과 눈이 마주쳤다. 어렴풋이 그가 커뮤니케이션팀에 속한걸 알고 있었고, 나도 파트너십팀과 커뮤니케이션팀 이중 소속인 관계로 일 얘기하면 복잡.. 원칙상 이중 소속이긴 하지만 두 팀장이 사이가 안 좋아서 파트너십팀 일만 하는중.. 뭐 어쨌건 아는 척을 하게 됐다. 







연하남의 매력


첫 인상이 포켓몬 이상해씨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양끝 입꼬리가 디폴트 상태로 살짝 올라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만화에 그려놓을 것 같은 치명적으로 귀여운 입선 그 위로, 그의 두 눈은 초롱초롱하게 나를 보며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파리를 잡아먹으려는 이상해씨/도마뱀 같이..! 딱 봐도 나보다 어렸다. 귀여운 애기라고 생각하고 필자는 누나답게 호쾌하게 먼저 대화를 걸었다. 




안녕, 너 커뮤니케이션팀이지? 나도 사실 커뮤니케이션팀 소속이긴 한데 호치민에 있어서 아마 날 모를거야. 난 OO이라고 해. 여기 회의실은 처음이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좀 낯설고만 ㅎㅎ



그냥 생각없이 시작한 가벼운 스몰토크였다.

그러자 포켓몬남은 동그랗게 반짝이던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이디님, 당연히 누군지 알죠. 하노이에 온 것을 환영해요! 하노이에는 얼마나 더 있어요?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환하게 웃을 때 초승달 모양으로 변하던 깜찍한 눈매



대화가 트인 이후로는 워크샵이 시작하기 전까지 내내 내 옆에 붙어서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말투가... 후.. 베트남어 말투가 이렇게 상냥하고 예뻤나? 사실 평상시에는 베트남어가 그렇게 듣기 좋은 높낮이의 언어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왜 때문이죠? 공기반 소리반을 섞어 중저음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데 그 말투와 말하면서 고개를 조금씩 끄덕끄덕하는 모습에서 자상함과 친절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이게 다 저 입꼬리 때문인가?..  


대화를 하면서 이 녀석이랑은 그냥 단순 직원사이로 끝나지는 않을 것을 예감했다. 그렇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로 본건 아니었다. 필자보다 한참 어려 보이니, 그냥 회사 밖에서 맥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친한 동생 누나 사이가 되겠네 하고 생각했다. 포켓몬남은 워크샵 시작 5분 전이 되자 갑자기 대화를 중단하고 단호하게 "하이디님, 저 이제 촬영하러 가볼게요. 이따 또 봐요." 라고 말하고 영상 촬영을 위해 카메라 삼각대 뒤로 섰다. 그 모습이 처음으로 좀 으른스럽고 섹시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후 그가 촬영하는 모습을 뒤에서 생각없이 보고 있었는데 이만 카메라를 잡고 있는 그의 오른팔에 시선이 사로잡혀 버렸다. 헉 분명 호리호리해보였는데 팔뚝은 왜 저런거야? 검은색 폴라 반팔 티셔츠 밑에서 그의 팔뚝 힘줄은 팽팽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로 좀 으른스럽고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대명사'가 주는 설렘

대명사: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을 대신 나타내는 낱말


워크샵이 끝나자마자 커뮤니케이션 팀장과 얘기할 기회가 생겨 회의실에서 남아 말을 하고 있는데 포켓몬남이 회의실 구석에서 떠나지 않고 쭈뼛쭈뼛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초승달 모양으로 눈을 접으며 "저는 이만 자리로 올라갈테니 안 바쁘실 떄 또 얘기해요, 하이디님"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어는 말 끝마다 상대를 지칭하는 호칭을 붙여주는 것이 공손함과 친절함의 표시다. 지난편(9편 참고)에서도 얘기했지만 간략하게 다시 설명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호칭으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부를 때 'anh', 여자는 'chi', 어린 사람은 남/녀 구분 없이 'em'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감사합니다(Cam on/깜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Cam on, anh" 또는 "Cam on, chi" 이렇게 상대방을 봐가면서 문장 끝에 호칭을 넣는다. 이름을 넣어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좀 이름성애자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이거 분명 나말고도 그런 사람 있을거야!  누군가 필자의 이름을 불러주면 자동으로 사르르 녹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미래에 아이를 낳아도 '누구네 엄마'가 아니라 '내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고집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미국에서도 유럽권에서도 심지어 베트남에서도 엄마나 아빠를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른다. 아이의 이름을 중심으로 '누구네 엄마', '누구네 아빠'라고 불리는 경우는 전 세계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튼 포켓몬남이 말 끝마다 내 이름을 붙여주니 들을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이름만 불러줘도 심쿵하는... 나 이렇게 쉬운 여자...) 


우리는 이후에도 얘기를 나누고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었다. 그런데 포켓몬남이 점심약속이 있었던 걸 깜빡했다며 저녁에 보아도 괜찮냐고 하는 것이다. 어차피 출장으로 온거라 하노이에 아는 사람도 없고, 로컬친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승낙했다. 정말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남동생이랑 같이 나가서 맥주 마시는거 뭐 별거 있나? 무수히 많이 경험해온 일 아닌가! 여전히 귀여운 동생과 편한 저녁자리일거라 생각했지 데이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약속시간 1시간 전쯤


"Chi 하이디(필자의 가명),
호텔 위치 좀 보내줄 수 있어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그 순간, '아.. 이거 데이트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노이의 롱비엔 다리를 건너, 어둠 속으로


베트남 오토바이 문화에 대해서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다. 똑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냥 약속 장소(주로 지하철 입구나 식당)에서 바로 만났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구당 평균 3대의 오토바이가 있는 베트남이다 보니 만남이 있을 때 오토바이로 픽업을 해주고 같이 만남의 장소로 가는 것이 이곳의 문화인듯 싶다. 호텔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저 멀리 부르릉~ 소리를 내며 크고 위압적인 오토바이가 다가왔다. 순박하고 귀여운 그의 이미지와는 꽤 상반되는 비주얼의 오토바이였다. 그는 헬멧과 마스크를 쓴 채 나를 반겨줬는데 머리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는데도 그의 눈웃음이 너무 활짝 피어 마스크 뒤에 숨겨진 그의 입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큰 헬멧, 호리호리한 몸매에 크다고 볼 수는 없는 키. 게다가 베트남 Z세대 답게 힙합 패션으로 검은색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입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앙증맞은 레고 같다고 생각했다. 


"하이디님~" 

그는 오토바이에 내려 여분의 헬멧을 들고와 내 머리에 조심스럽게 씌워줬다. 베트남에서는 이 장면이 굉장히 흔해서 별 뜻 없을 수도 있으나, 필자는 아직까지도 매번 누군가 내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눈높이를 맞춰 신경써줄 때 기분이 이상해진다 (물론 좋은 쪽으로). 그의 오토바이에 올라 타 어색하게 밀착된 상태로 하노이 도시를 나섰다. 포켓몬남은 꼭 나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따라만 오라고 했다.



Long Bien Bridge (Photo credit: Hector Garcia, Rungbachduong)
롱비엔 다리 건널 때 찍은 영상에서 캡처해봄



우리는 하노이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롱비엔 다리(Long Bien)를 지나갔다. 포켓몬남은 이 다리가 자기 나이보다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포켓몬남이 20 후반이고, 이 다리는 한 30년쯤 됐나보구나 했다. 웬걸 구글에 검색해보니 120년 됐다네..? 1903년,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 생긴 다리이자 '누워있는 에펠탑'으로 알려져 있는 하노이의 첫 철제 다리이다.


철제로 만들어진 다리라 기찻길을 가는 것처럼 덜컹덜컹거리는 소리가 났고, 마침 우리가 다리를 지날 때 석양이 지기 시작하면서 다리가 가로지르는 레드강(Red River)이 본인의 이름에 더 어울리게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청각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낭만적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출장 중에 이렇게 낭만적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자유의 몸이란! 싱글여자의 삶이란! 정말 기분 째진다! 오토바이 뒤에서 이 낭만적인 현장을 촬영하며 "야호!!!!!!"하고 소리를 질렀다. 


파스텔톤의 분홍빛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고, 다리를 건너고 나니 어느덧 우리는 깜깜한 암흑 속에 있었다. 하노이 도시를 벗어나 정글 같은 곳으로 향했고 길에는 가로등조차 몇 개 없었다. 사실 포켓몬남이 직원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좀 불안해야 했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길이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도 요리조리 능숙하게 우회전 좌회전을 하다가 저 멀리 하나의 팻말등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던 벌판에 정글나무로 펜스를 친 공간이 보였고 나무줄기를 걷어 그 안을 들여다보니 넓은 테라스의 식당이 하나 있었다. 심지어 화덕구이 피자집이었다. 분위기도 메뉴도 완벽했다.


필자가 실제로 촬영한 사진. 말 그대로 어둠 속 한 가운데에 뚱딴지 같이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화덕구이 피자집은 상당히 컸는데, 드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포켓몬과 필자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귀여운 닥스훈트 강아지만이 웡!웡!대며 우리를 반겨줬다.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 속 작은 주황색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에 앉아 우리는 피자와 맥주를 즐기며 서로의 인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도 필자도 커뮤니케이션 팀인 사람인만큼 창의적, 예술적 활동을 좋아하는데 포켓몬남은 그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힙합음악과 스케이트보드 타는 것을 즐긴다고 알려줬고, 필자는 기타치며 노래 만들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유튜브에 올려진 자작곡을 들려줬다. 보통 노래를 들려주면 1분 정도 듣고 핸드폰을 돌려주기 마련인데 그는 4분이 되어가는 노래를 끝까지 다 듣고, 더욱 땡그랗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Chi 하이디, you are a wonder woman..!" 


그날 우리는 2차, 3차, 4차까지 밤새도록 즐기며 그 다음날까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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