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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Jan 04. 2024

쌀국수에 라임즙 짜주는 남자 어떤데?

[제13편] "하룻밤 하노이의 꿈" 그 이상이 되기 위해


지난 편, 하노이 출장 중 예기치 못하게 베트남 연하 직원과 데이트를 하게 됐다. 우리는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어둠 속 화로구이 피자집에 도착해 피맥을 즐기며 음악 얘기를 나누었다. 피자집은 고작 1차였다. 우리는 그날 밤을 새며 함께 보내고 심지어 그 다음날 오후 공항 출발 직전까지 같이 있게 된다.  




2019년, 추억 속 '따 히엔' 맥주거리


조용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맥주를 마시다 보니 흥이 오른 필자. 몇 년 전 홀로 하노이 여행에서 갔던 맥주의 거리 '히엔 거리'가 떠올라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잠시 그 당시 추억을 되돌아 보겠다.

따 히엔 맥주거리 (사진 출처: La Sinfonia Del Rey Hotel & Spa)

히엔 길거리에는 낮은 목욕탕 의자와 테이블을 두고 야외에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곳들이 쭉 있는데 그 중 가장 안전하고 무난해 보이는 곳에 혼자 맥주를 마시는 한국인 추정 젊은 아저씨/오빠가 있었다. 좀 바보같이 보이는데 힙한거 같기도 한.. 내가 좋아하는 '아소토 유니온'의 보컬 같은 느낌의 아저씨가 공심채 볶음 하나와 소주 하나를 시켜놓고 마시고 있었다.


(좌) 아소토 유니온 보컬 김반장님, (우) 패기 넘치던 20대 때의 필자 모습 + 누가 아소토 유니온 보컬 도펠겡어인지 알겠죠?


필자는 패기 있게 원피스를 입고 혼자 히엔 거리에 나오긴 했지만 당시에는 베트남 여행이 처음인지라 겉보기와 다르게 사실 조금 쫄아있는 상태였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이 아소토 유니온 보컬오빠와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뭐 기나 관상이나 패션을 보았을 때 내게 해를 끼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아 대뜸 한국인이냐, 합석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아소토 유니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버리하게 "어..네..네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한국어로 서로 얘기를 하기 시작하니 옆 테이블에 홀로 앉았던 아저씨/오빠가 자기도 한국인이라며 합석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로컬 직원을 알고 있었고, 나중에 로컬 직원도 합석해 넷이서 다같이 하노이에서는 아직도 꽤 유명한 "HERO" 클럽에서 다같이 빅뱅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건전하게 집에 돌아간 기억이 있다.






2023년, 포켓몬남과 '따 히엔' 맥주거리


필자는 그 날 밤의 즐거운 추억이 떠올라 포켓몬남에게도 같이 가자고 부탁했고, 우리는 히엔거리에서 맥주를 마셨다. 싸구려맛이 났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는 싸구려맛이 주는 운치가 있다. 목욕탕 의자에 쭈구리고 앉아 쩐내 섞였지만 정말 시원했던 맥주를 몇 잔 비우고 나니 더이상 춤을 참을 수 없었다. 포켓몬남은 흥에 겨운 필자의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맥주의 거리에도 클럽이 있다며 데리고 갔다. '1900 Club Hanoi'라는 클럽인데 꽤 크고 깨끗하고 건전(?)해보였다. (클럽이 어떻게 건전하냐고 할 수 있지만.. 이곳은 정말 건전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나온다.) 포켓몬남은 밤새 내내 내가 일절 돈을 지불하지 못하게 했다. 웬만하면 나도 더치페이를 하거나 내가 다 내는 편인데 포켓몬남이 하도 완강하게 지갑도 못꺼내게 해서 그냥 포켓몬남이 호치민에 놀러오면 내가 다 내겠다고 말하고 마음 편히 즐겼다. 그가 클럽 입장권을 지불하고 클럽 인파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때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다. 



클럽은 정말 놀랍도록 건전했다!.. (뭘 기대한거지 나레기?) 하필 그날이 K팝 메들리의 밤이었는데 한쪽 벽면에 거대한 전광판에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뮤직비디오가 틀어져 있었고, 무대에는 드랙퀸 (Drag queen, 옷차림이나 행동을 통해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남자, 퍼포먼스의 일종) 언니 두 분이 핑크 카우보이 모자와 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었고, 관객들은 K팝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일제히 같은 동작으로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을 하고 있었다. 이게 콘서트인지 클럽인지 헷갈릴 정도로 모두 노래에 진심이었다. 필자의 눈은 열심히 주변을 스캔하고 분위기를 파악하기 바빴는데 클럽의 사람들은 뮤직비디오를 보며 정말 행복하고 순수한 얼굴로 떼창만 하고 있었다. 아무도 서로를 탐하거나 만지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2019년 이후로 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빅뱅노래가 클럽을 지배하고 있다니..!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거기에 블랙핑크 노래가 추가됐다는 것 뿐이었다. 


영상캡처본이라 사진이 많이 흔들렸는데 지드래곤 삐딱하게 뮤직비디오가 틀어져 있고,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하는 무리를 볼 수 있다.



거기서 나의 포켓몬남도 해맑은 얼굴로 '붉은 노을'을 크게 부르며 방방 뛰고 있었다.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모두가 떼창을 하는데 정작 한국인인 나만 가사를 몰라서 대충 뻐끔거리며 립싱크를 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대충 후렴만 부르는 정도가 아니라 1절 2절까지도 한글 가사를 부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래 이 노래를 4년동안 매번 클럽에서 들었으면 외울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97년생인 나의 포켓몬남이 대학시절 내내 이 노래를 들었다면 노래로 인해 알게 모르게 그에게 스며들어간 한국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여실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K팝, K드라마, K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시대라는 얘기는 계속 듣지만 무력, 경제력이 아닌 '문화의 힘'으로 국가의 위상이 높여지고, 타국민들에게 퍼진 영향력을 느낄 때면 정말 놀랍다. 데이팅에 있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이미지가 크나큰 플러스로 한몫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클럽에서 열심히 방방 뛰고 놀다가 새벽 3시쯤 나와 또 다시 히엔거리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언젠가 하노이 근교의 바짱(Bat Trang)이라는 도자기 마을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포켓몬남이 당장 아침이 되면 같이 가자고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그닥 멀지 않고, 늦은 오후 비행기 출발시간에 맞춰 오기에도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가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애매했다. 아침 6시에 출발할거면 2-3시간은 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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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의 집에 가게 되었다. 

잠깐만 눈 붙이고 출발하기로 했다. 필자는 과연 바짱에 갔을까?...






It's alright, 우리 집으로 가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한 손으로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를 뒤에서 감싸고 있는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놓지 않고 자상하게 어루만져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의 등에 밀착된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포켓몬남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정말 몇 시간만 자다가 바짱에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어루만짐은 사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터치긴 했지만, 사실 그때까지 우리는 입맞춤이나 포옹도 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클럽에서 방방 뛰었다보니 둘다 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그가 어색하게 "수.. 수건 줄게요 하이디님. 씻..고 올래요?" 라고 물었다. 샤워 후 그가 건네준 힙합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입고 나와 보니 웬걸 침대 한 가운데에 베개가 세로로 눕혀져 있었다...?



의외였고, 귀여웠다!

이 나이에 이 시간에 남녀가 한 방에 같이 있는데 삼팔선 베개라니! 세상에.. 정말 날 공주 모시듯이 하더니 "지켜줄" 생각인건가? 우리는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누웠지만 우리 사이에는 베개가 있었다. 우스웠다. 수학여행에 온 기분이 들었다. 아침 6시에 바짱으로 출발해야 하니 알람을 맞추고 침대 옆 등불을 끄고 서로 '굿나잇'을 허공에 속삭였다. 그러고 정말 잠이 들기 위해 편한 자세를 취하자마자.. 그가 크게 한 번 한숨을 쉬더니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Sorry, chi." 라고 말하고, 베개를 내던지고 키스를 했다.



아.......... 어려서인걸까.. 인스타그램 릴스에 혀를 엄청 낼름거리는 염소 영상이 있는데... 그의 돌진키스가 그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내불내불레불뤠불우뢀랄라.. 정말 허겁지겁, 여유 없이 돌진하는 키스였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로 허겁지겁이었다. 이 이상 구체적인 것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여러모로 어리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가 내게 키스를 하고 나서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매직 트라이앵글에서 만났던 유럽사람들과의 차이점을 느꼈다. 미래를 기대하게 하거나 막중한 책임이 더해질 수 있는 말을 최대한 자중하던 유럽남자들과는 달리 베트남 옥택연 오빠도 포켓몬남도 굉장히 쉽게 사랑고백을 했다. 그렇게 보면 나이가 어려서 오는 미숙함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I love you, chi." 

그 말을 듣고 나는 충격에 빠져 그를 밀치고, "아니 그럴리가 없어! 우리는 만난지 하루밖에 안 됐는걸?"이라고 바로 대답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가 나를 사랑하는게 확실하다고 말해줬다. 그걸 아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며. 참 단순하다 싶었다. 어쩌면 복잡한 것보다는 차라리 단순한게 나을지도 몰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마음이 진심인 것 같았으니. 그는 잠이 들고 난 이후에도 내내 나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과 감성적인 음악


다음날 아침 6시 알람이 울렸지만 2-3시간 자는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는 너무너무 피곤해서 일어날 수 없었다. 결국 바짱여행을 포기하고 좀더 자기로 했다. 느지막히 일어나 그는 풍성하고 부스스한 그의 까치집 머리를 털고 노래를 틀었다. PJ Morton 의 Built for Love 였다. 그러고서는 부엌에 가 꿀차를 타다 호호 불며 내 손에 찻잔을 쥐어주었다. 창문에서 하노이의 햇살이 그의 부엌 테이블에 있는 그림 위로 내려 쬐었다. 힙합과 스케이트 보드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에 참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조용히 꿀차를 마시며 노래를 듣는데 행복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르의 노래인데 또 마침 그가 따로 저장해둔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노래였다. 필자는 이 플레이리스트를 공유받고 이후 몇주간 그가 저장해둔 노래들을 반복해서 듣게 된다. 그 로맨틱한 감정에 이입되고 싶다면, 그의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여기 공유하도록 하겠다.



그중 그날 아침에 들은 PJ Morton 의 Built for Love 라는 노래를 특히나 애정하는데 그 노래의 가사가 너무나도 절묘하게 우리의 상황에 의미를 더하는 것 같았다. 그가 마치 필자에게 "한 번 시도해보자, 우리가 지난 밤 만들어낸 감정을 그냥 하룻밤 하노이의 꿈으로 치부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네게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 관계를 끝내기 전에 잠시만 생각해봐줬으면 해. 지금 이건 우리의 길 위에 있는 작은 혹일뿐이고, 이전에 우리가 그러했듯 우리는 이 혹을 넘어설 수 있을거야. 그리고 함께 넘으면서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거야.

우리가 가진 이 것은 분명 가치가 있어. 그냥 포기할 수는 없어. 더욱 견고하게 가자. 도전할 가치가 없다면 지킬 가치도 없는거잖아.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이 나는 기다려줄 수 있어. 그러니 여태껏 우리가 이룬 것을 오늘 이렇게 잃지는 말자. 우리는 사랑을 하기 위해 정해진 인연인걸.  

Built for Love 노래 가사 번역






다정함이 담긴 쌀국수

여기 대존맛 국물의 깊이가 다름! 적극 추천!

아침 식사로 닭쌀국수를 먹었다. 이전부터 느끼는 것이고, 호치민 사람들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음식은 호치민보다 하노이가 훨씬 맛있다. 특히 닭쌀국수가 그렇다. 이전 편에서 베트남 옥택연 오빠가 게요리 시키고 게살 다 발라줬던 것이 기억나는가. 포켓몬남도 지극정성으로 닭쌀국수에 넣을 재료를 챙겨줬다. 라임즙도 숟가락 위에 곱게 정성껏 짜주고, 라임 짤 때 나오는 씨앗은 국물에 안 들어가게 조심스럽게 거른 다음, 핫소스, 해선장 소스, 고추도 다 넣어줬다. 하나하나 재료를 넣을 때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내 눈을 맞추며 "이만큼이면 되나요?"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사실 육체적 노동으로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손을 더럽힐 수는 없다는 듯 애지중지 공주 대우해주던 모습이 너무나도 자상하게 느껴졌다.


워낙 인기 많은 식당이라 자리가 부족해 큰 원탁 테이블에 다른 가족과 합석했는데, 그 상황을 이용해 포켓몬남이 자기 가족과의 상견례 자리인듯 연기를 했다. 그러다가 식사 도중 가족이 한 차례 바뀌어서 또 우리집 가족과 상견례인듯 컨셉놀이를 하면서 꽁냥꽁냥댔다. 먹으면서도 내내 귓속말 하고 웃고 팔에 기대고 사랑이 넘쳐났다. 이런 드립을 치고 바보같은 장난으로 깔깔댔던 게 언제였지. 매직 트라이앵글의 남자들과는 밤이 지나고 술이 깨고 나면 서로 쿨한 척 가오를 부리느라 어색함과 태평함 그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썼어야 했었는데 말이지. 이렇게 함께 바보같이 굴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웠었나보다. 



하노이 길거리와 카페가 있던 골목


그 이후 포켓몬남은 조금 특이한 카페에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다. 엄청 조용히 있어야 하는 카페라서 속삭이는 것만 가능하다고. 조금이라도 시끄러우면 주인장이 경고를 하는 카페라고 했다.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고 나서는 옆에 꼭 붙어 앉아 한 쪽 손은 잡은 채로 서로의 귓가에 가깝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가 한 템포 쉬고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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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님, 우리 그럼 이제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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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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