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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Mar 17. 2024

어린 왕자의 영역표시

[제15편] 시몬 첫 번째 이야기


필자의 말: 그동안 연애 공백이 길었다. 이 블로그 시리즈를 쓰게 된 것도 공백기간 동안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회상하며 써내려 온 것이었는데 이제 드디어 현 상황에 대해서도 쓸 수 있게 됐다.





- 지난 6월쯤 -




여행자의 거리, 부이비엔

Photo credit: Travel with Suri (https://youtu.be/NtO_gREZT-w?si=cjG8ZGe9u-2ykrHt)


호치민에서 가장 유흥의 길거리로 알려진 곳이 바로 "여행자의 거리"라고 불리는 부이비엔 (Bui Vien)이다. 부이비엔 거리 끝자락에 광란의 부이비엔 과는 사뭇 다르게 살짝 고급스럽기까지 한 루프탑 바가 있으니, 바로 나의 최애 주말 술장소(?) - 바나나 마마(Banana Mama)다. 프랑스인이 주인장이고 휴가/휴양 느낌이 나는 탁 트인 루프탑바로 밤에는 아름다운 호치민 야경을 보기에 좋은 곳이다. 대부분이 야외인 루프탑 바이다 보니, 실내 바에 비해 밝은 분위기고, DJ가 있는 작은 댄스 플로어와 그 외의 공간에는 스탠딩 테이블만 곳곳에 놓여져 있는 구조다. 이곳은 외국인 거주자들과 관광객들에게 입소문을 타  아주 잘 알려졌는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스몰토크를 나누고 친구를 사귀기에 좋은 곳인지라 서양인 감성에 특히나 더 잘 맞는 것 같다. 영국인 친구인 에밀리와 한참 친했을 적 매 주말마다 이곳을 방문했다. 둘다 새로운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수다 떠는 것을 즐기는 편이고 그러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지난 6월부터 지금까지 하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이제는 바텐더 친구들이랑도 친해져 같이 노래방에 가는 사이까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처음 시작된 날로 돌아가겠다. 그날도 에밀리와 내가 금요일밤을 즐기기 위해 나왔는데 마침 내가 먼저 도착하게 돼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때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금발 머리카락, 파란 눈동자의 어린 왕자 같은 비주얼을 가진 웨이터가 나를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시몬. 우선 비주얼에 말문이 턱 막혔지만, 웬만한 서양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아니 어떻게 알았지? 게다가 저 생글생글한 미소.. 너무 치명적이야.. 순식간에 나를 수줍은 소녀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뭐! 잘생긴 사람 처음 보나? 잘생긴 사람은 어딜 가든 있긴 하다. 내 사람이 아니어서 그럴뿐.. 게다가 그는 바텐더이고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의 친절함은 서비스에 불과할텐데 거기에 의미부여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눈에만 잘생긴건 아니었나보다. 댄스 플로어에서 짝 붙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어떤 핫한 여자도 그의 업무복장인 밀짚모자를 뺏어가며 플러팅을 하는 것을 보니.. 그러다보니 나는 그저 그를 잘생긴 웨이터라고만 생각했다.  








영국인 찾기 내기


그의 존재를 잊고, 에밀리와 나는 그날 밤새도록 내기를 하게 되는데, 영국인인 에밀리가 손님들의 외양새만으로도 영국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나는 손님들이 해리포터의 루퍼트 같이 생기지 않은 이상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영국인 찾기 내기'를 시작했는데, 내기 특성상 루프탑 바에 있는 모든 손님을 관찰해야 했고 관찰한 후에는 정답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과 직접 대화를 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그날  그 바에 오고 간 외국인 거주자들과 관광객들 수십명과 수다를 떨게 되었다. 


바나나마마 루프탑바 (Photo credit: Banana Mama Rooftop Bar)


그러던 중 시몬이 내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퉁명스럽게 "오늘 하루 한 20명의 남자들이랑 플러팅 하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고 가는거다..! 아니 세상에 이 앙큼함은 뭐야? 날 계속 보고 있었던거야? 그의 말 한 마디에 갑자기 온갖 상상이 자라났고, 그날 처음으로 나와 에밀리는 바나나 마마가 문을 닫는 새벽 2시까지 그곳에 있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우리는 자리를 뜨려고 바텐더 친구들에게 서양식(?)으로 허그인사를 권했다.  그런데 시몬이 자기는 프랑스인이라서 허그 따위는 하지 않는다며 비쥬(bisou, 볼키스)만 한댄다. 아오 프랑스 녀석.. 그래 비쥬하자 해! 라고 말하고 그의 양 볼에 프랑스식이라기에는 너무 미국인의 퍼포먼스처럼 Muah! Muah! (서양식 뽀뽀소리) 하고 진짜 가려는데 다른 직원들도 다같이 나와 우리와 같이 좀더 술을 마시다 갈 것을 권했다.



그때 갑자기 일전에 시몬에게 플러팅 작렬이었던 검은 원피스 여자가 들어왔다. 만취한 듯한 그녀가 비틀대며 들어와 시몬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더니 문득 하는 말: 



"너........ 프로스티튜트(prostitute, 매춘부)니?"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충격적이었다. 당시 시몬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는데 엄청나게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자기가 왜 프로스티튜트냐며 아니라고 말하고 여자를 달래고 내보냈다. 







영업종료 후 만취수다


이후 다시 직원들이랑 다같이 데낄라병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둥글게 앉아 또 수다를 떨었는데 시몬은 내 옆에서 나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에밀리와 다른 직원들은 우리 둘을 둘만의 세상 속에 두고 그들끼리 수다를 떨었다. 그날 나는 우리 둘이 나눈 대화를 거의 다 기억하지 못한다. 우선 시몬이 프로스티튜트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은 관계로 그것에 대한 속상함을 털었고, 그 다음은 서로의 연애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나는 만취상태로 그에게 별의별 말을 다 했나보다. 6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가 정말 내 운명의 사랑이자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는 말도, 우리가 죽어서 나란히 묻히면 땅으로 돌아가 원소가 되어 하나의 원소로 결합할 것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 예컨대 그가 수소고 내가 산소면 우리가 합쳐서 물(H2O)이 (천상 문대생인 관계로 과학지식이 허술함,,) 될 것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는 얘기마저도 했다. 


시몬은 수시로 내게 엄청난 매력이 있는 것 같다며 내게 몹시 끌린다고 말했는데, 달콤한 말과는 상반될 정도로 퉁명스러운 표정과 자세로 심지어 좀 불쾌해 보일 정도의 태도로 그 얘기를 계속 했다. 마치 제3자의 관점으로는 내가 매력적이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빠지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런 묘한 태도가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미친듯이 사랑에 빠져 달려드는 상대들은 많았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감정을 느낄 것 같을 때마다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치면서 자기 자신을 제지하려는 듯 하는데.. 그 절제력이 신중하고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만취 상태였다. 그가 계속 내게 매력적이라고 하니까 그걸 그린라이트로 알아듣고 그만.. 대화 도중 내가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러 다가갔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내가 상대에게 먼저 키스를 하려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드문 경우인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러 천천히 다가가 나의 숨결이 그의 귀와 볼 언저리에서 호흡하고 있을 때, 그는 몸을 뒤로 하고, 이런 식으로 키스를 하고 싶지는 않다며 손을 내밀고 정중하게 거부했다. 또 충격..!!! 감정의 교류를 확신했었는데..!! 이걸 거절한다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날 이어서 거의 밤을 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눴다. 



TNR Saigon (Photo credit: @joanik.tahmer)


그러고 우리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호치민 외국인들에게 또 유명한 곳 중 하나인 TNR Saigon 에 갔다. 이곳은 힙합풍의 베트남 Z세대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빨간 조명에 전화 수화기가 천장에서 댕글댕글 달려있는 인테리어라 동굴 같은 느낌을 준다. (실내인데 담배피는 사람이 많아서 TNR 갔다온 날은 머리카락과 옷에 담배냄새가 잔뜩 밴다는 점^^ 주의!) TNR은 새벽 4시에 문을 닫아서 바나나 마마 직원들이 2시에 영업을 종료하고 한 잔 하고 싶을 때 종종 가는 곳이다.






프랑스인의 영역표시


우리는 직원들과 다같이 TNR에 입장했는데 어쩌다보니 바나나 직원들이랑 같이 있지 못하고 중간에 어떤 두 영국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에밀리와 나의 '영국인 찾기 내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 하필 입장하자마자 우리 앞에 있던 두 명의 남성이 영국 사람이었던 것. 그냥 대충 말하고 빠지려고 몇 번이나 화장실도 가고 했는데 하필 또 에밀리랑 고향이 같은 사람이 있었고, 에밀리와 그 사람의 대화가 통 끊기지를 않아 나도 다른 영국 남자와 계속 스몰토크를 나누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다가 지쳤다는 듯 시몬이 기어코 그 남자와 나의 사이에 들어왔다. 능청스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 남자에게 자기는 이만 갈거라서 내게 인사 좀 하겠다고 말하더니, 나를 정중앙 앞에 세워 놓고 생긋 웃은 뒤 비쥬인사를 하겠댄다. 그 당시 내가 만취상태였어서 그랬던 것인지 그 비쥬는 엄청나게 슬로우 모션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른쪽 볼, 왼쪽 볼, 나의 볼 한 쪽 한 쪽을 소중히 여기듯 지긋이 그의 얼굴이 내 얼굴에 접촉했다. 양 볼을 다 맞댄 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는 이어 내 입술에 아주 느리게 아주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아마 그 키스는 총 3초도 되지 않았을거다. 단 한 번의 입맞춤이었고 뭐 흔히들 아는 '프렌치 키스' = '건축의 개론에서 조정석이 말한 (마구 비비는) 키스'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아주 보송보송한 입맞춤이었다. 하........... 그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최근 4년 중 가장 최고의 입맞춤이었다. 하....  지금 생각해도 녹아내리네. 단 3초면 알 수 있었다. 그 입술의 밀도, 텐션, 압력, 습도와 박자.. 이런 입맞춤은 평생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케미의 입맞춤이었다. 운이 좋으면 또 4년 정도 기다리면 나타날법한?








다음날




시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본인에게 H20 대화를 해준 것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 이야기가 여간 신선했나 보다. 그는 내가 술에 취해 기억을 못할지 몰라도 본인은 그 얘기를 다 기억한다고 얘기해줬다. 그러고서는 내가 대화를 잘 기억하지 못하자 꽤나 섭섭함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강렬한 첫만남을 갖고도 그 이후로 4개월이 지나도록 서로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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