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포켓몬남은 자작곡을 남기고..
글 안 쓴지 두 달이나 됐더라고요.
주요 이유는 더는 포켓몬남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글을 쓰게 되는 주원동력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남아 있는 애정 때문인데 마지막으로 본지 5개월이 지난 포켓몬남을 굳이 회상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렇게 소개 문단이 스포일러가 되어버리네요. 이미 제목에서 예상하셨죠? 그럼 이번 편은 어떻게 포켓몬남과의 스토리가 끝나게 됐는지 이야기해볼게요.
포켓몬남과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읽고 싶으시다면 이전 글을 확인해주세요.
포켓몬남은 물었다. "하이디님, 우리 그럼 이제 뭐예요?"
여태 호치민에서 만나온 남자들은 내가 그 질문을 먼저 하게 했었다. 나는 사귀고 싶었다. 사귀는 관계가 아니고서는 친밀한 애정행위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 끝에 확실히 느끼게 됐다. 그런데 포켓몬남은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꼭 붙잡고 나를 진지하지만 다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다. 자기는 원거리 연애를 해본 적이 없지만 우리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자기는 노력할 의향이 있다고.
원거리 연애 유경험자로서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미 우리는 나이 차도 너무 많이 나고, 라이프스타일도 다르고, 언어 차이도 있는데.. 같은 지역에서 살아도 내 마음이 확실치 못할텐데 원거리 연애를 하자고? 그런데도 나는 포켓몬남의 비현실적인 제안에 감동을 받았나보다. 그동안 나를 즐길거리로만 여기고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피해왔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로는 그의 제안이 우스꽝스러운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슴은 찡해져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포켓몬남은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으니 생각해보고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고서는 나와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으니 같이 셀카를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것도 나와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던 이전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집으로 가는 택시까지 손수 아는 운전자를 구해 잡아다주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너무 보고싶다 ㅠㅠㅠㅠ"며 엄청나게 아쉬워 했다. 나 또한 하노이를 떠나는 것이 슬퍼졌다. 탑승구 앞에서 호치민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와 내가 찍은 셀카를 한참이나 봤다. 둘이 같이 찍힌 모습이 퍽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치민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와 물리적으로 멀어졌다는 것이 여전히 슬펐다. 그가 하룻밤만에 너무나도 쉽게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고백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씨앗이 되어 내 마음 속에 심어졌고, 그 씨앗은 싹이 터 마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주는 힘이 그렇다. 그래서 이전에 만나던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조심스러워 한걸까. 그날 우리는 하루종일 연락을 주고 받았고, 자기 전에는 그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우리는 서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얘기했고, 나는 사실 하노이 때 불확실했던 마음이 사귀어보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서 결국 돌고 돌아 그 얘기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관계말야.." 이 이야기를 내가 먼저 시작한 이유는 그의 무모한 돌진을 한 번 더 느끼고 설득되고 싶어서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귀기 전에 그 마음이 견고한지 한 번 떠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은 사실 '나도 사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였는데 말로는 의심을 내보였다.
"우리 관계말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나도 네가 너무 좋아. 너 정말 매력적이야
그런데 원거리 연애 정말 힘들텐데.. 현실적으로 원거리 연애 하려면 우리 한 달에 한 번은 적어도 서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할거야. 나는 하노이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는 거 괜찮긴 한데.. 너도 괜찮겠어?"
그 질문에 대한 포켓몬남의 대답은 상상했던 전개와 정반대 방향이었다.
"맞아요, 하이디님.. 저도 하이디님 말에 동의해요. 아무래도 원거리 연애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냥 우리 이대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해요."
???
아니...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자존심이고 뭐고 확실하게 하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다급하게 포켓몬남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나는.. 노력할 의향이 있다고 말하려고 한거였어. 그런데 너는 어려울 것 같다는거지?"
아련한 눈빛을 보이며 그가 대답했다.
"네, 당신은 제게 아름답게 추억될거예요."
...
일주일도, 한 달도 아니고 하루만에 이렇게 태도가 바뀔 수 있나? 내 마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던 사랑의 싹이 그의 대답을 듣고 폭삭 힘을 잃었다. 어제는 노력하겠다며.. 사랑한다며.. 그 마음이 이렇게 쉽게 포기할 정도였으면 고백을 하지 말았어야지.. 나는 너의 그런 모습으로 인해 마음이 생겨버렸는데.. --- 그 말을 나는 그에게 하지 못했다. 오피스 지사가 다르니 자주 보지는 않지만 업무상 언젠가는 또 봐야 할 사람이었고, 하루만에 식어버린 그의 사랑만큼이나 하루만에 무성하게 자라버린 나의 사랑이 우스웠다.
그를 만난 이후로 쭉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던 PJ Morton 의 Built for Love 는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노래에서 아리게 만드는 노래로 한순간에 바뀌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자라났지만 가꾸어줄 이 없는 마음에 한동안 꽤나 앓게 된다. 그에게 직접 그 마음을 전하지는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탄생하게 된 자작곡이 (오글주의) 바로 'Pathetic (한심해)' 라는 노래다.
가사:
I'm so pathetic. Hoping that he'd beg me, "Don't leave me, baby. There's no one quite like you." Testing man's heart - Baby, do you really love me? Because I don't want to be the one left in the end. All the sweet words, all the fantasy you give me, they grow and grow so big that it scares me.
And what if it changes? My heart would be shattered you see.
And what if it changes? My heart would be shattered and that's the reason why I got to push you away. But here I am deep inside just waiting to be loved. But here I am deep inside just wanting to be loved.
난 정말 한심하지. 그가 내게 '나를 떠나지마, 너같은 사람은 없어'라고 말하며 나를 붙잡아주길 바라고 있지. 넌 나를 정말 사랑할까? 난 결국 혼자 남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괜히 너의 마음을 떠보게 돼. 네가 하는 모든 달콤한 말들, 모든 환상적인 생각들이 내 안에서 너무 크게 자라나니 겁이 나.
그래놓고 네 마음이 변한다면?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겠지.
그래놓고 네 마음이 변한다면?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날테니, 그러니 나는 너를 밀칠 수밖에 없어.
나의 깊은 진심은 사실 사랑받고 싶어 기다리고 있는거면서..
나의 깊은 진심은 사실 사랑받고 싶은 거면서..
이렇게 짧게 포켓몬남과의 일화를 끝낼 수도 있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도 짧게나마 공유하겠다.
7월 출장 때 그를 보고 한동안 앓았다.
그 당시 적어두었던 글이 이러하다:
지난 주말 하노이에서의 여파 이후로 내내 허전하고 슬프다. 정서적으로 우울할 땐 신체적으로 바쁜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 러닝을 하러 갔다. 러닝 초짜이지만 쉬지 않고 1시간반을 뛰었다. 이전에는 뛰면 기분이 좋아졌다. 하노이 이후로는 러닝을 할 때 도리어 화가 나고 한숨이 난다. 몸에 열이 오름과 동시에 하..!!!!!!! 식빵!!!! 식빵3끼!!!! 왜?!!!!! 라고 혼잣말로 토로하게 된다.
호치민에서 몇 안 되는 드넓은 응옌후에 광장, 그 한 가운데에 회사건물이 놓여져 있는데,
벽 두 면이 통유리창인 오피스에서 시내뷰를 내려다보면서도
"아, 답답해"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탁트인 전경과 끝없는 초록빛 자연 속에서도 답답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눈에 띄는 특이점 하나 없이 일관되게 박힌 도로 위 돌조각과 수평선까지 뻗은 초원
뜨고 지는 태양의 햇빛만이 풍경의 변화를 주던 독일 동네 풍경. (필자는 고등학교 때 독일에서 살았었다)
간간히 새소리만 울려 더욱 고독했던 적막이 얼마나 숨막혔었는지.
나는 물리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나와 다른 사람의 세계 속을 탐험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세계 속에서 해방을 느끼나 보다.
그런데 더는 탐험하고 싶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 7월 출장 일주일 뒤 쓴 일기
한 달이 지난 8월쯤 그에게 내가 정서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결국 알려줬다. 사실 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포켓몬남이 쉽게 포기했을 때 상심이 컸었다고. 그는 미안하다고 얘기했지만 그와의 온라인 대화는 후련하지 못했다. 말하는 것에 대한 직답을 듣지 못하고 계속 애매하게 빙빙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그와의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임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언어/문화적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얘기하고 나니 우리의 불소통이 그의 영어실력의 한계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차차 아리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그러고 두 달 후 10월, 전체 오피스 수련회가 있어 호치민팀 전원이 하노이 출장을 갔다. 호치민팀은 수련회 전날 미리 하노이에 도착했고, 에어비앤비 하나를 예약해 다같이 숙박했다. 그날 저녁 포켓몬남이 연락이 왔다. "하이디님, 하노이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그날밤 나는 상사가 잠든 사이 몰래 (어차피 근무 외 자유시간이니 나가는 것은 자유였지만 워낙 상사가 사적인 일에 관심과 질문이 많아 골치가 아픔) 에어비앤비를 나왔다. 그와 다시 재회해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다가 새벽 5시에 다시 에어비앤비로 돌아왔다.
두 번째 만남이었건만 염소키스는 그대로였고, 그 실력이 나아질 가능성이 적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구술적 소통에도 한계가 있는데 신체적 기술에도 한계를 느끼니 더는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아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내 눈에 귀여운 사람이었고, 수련회에서도 많은 직원들 인파 속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게 눈웃음을 주고 받았지만 - 그뿐 더는 그를 남자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포켓몬남과의 로맨스는 끝이 난다.
Easy come, easy go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간다는 뜻.
옛날 옛적에 내가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그 4년 사귀었다는 그 남자, 90s love 에서 MZ love 로 전환하게 했다던 (생소하다면 2편으로!) 그 남자가 즐겨부르던 브루노 마스의 Grenade 첫 가사이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머릿 속에서는 그 남자의 목소리로 음절이 흐르고, 엄청 못부르는데 엄청 힘주어 인상 쓰면서 열심히 부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정말 사랑한 모습. 그 노래를 부를 때면 항상 웃음이 났었는데. 그와 헤어진지 5년이 지난 지금, 더는 아프지도 않다지만.. 그래도 지워져 없어졌으면 좋겠다.
사실 포켓몬남과의 만남은 상당히 일회성이 짙었다. 7월 출장 중 하루, 10월 출장 중 하루만 실제로 보았으니 말이다. 다음 편부터는 드디어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사람과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예정이다. 작년 5월부터 현재 3월까지 거의 내가 호치민 살이를 하게 된 1년 조금 넘는 시간 중 가장 오래 이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 '시몬'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주부터 공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