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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Zorba Aug 29. 2018

아이의 문제는 '모두 내 탓'? 부모의 죄책감

(18) 첫째와 둘째 사이_아빠


 얼마 전 아내에게 들은 한 친구의 이야기다. 친구의 사랑스런 딸 아이는 이제 막 다섯 살이 될 무렵이었고, 가끔 시야가 흐릿하게 보인다 하여 안과를 들렀다 ‘난시’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한다. 안경을 쓰는 이라면 안경점에서 시력검사를 하다 난시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냥 좀 불편하겠거니, 하고 그닥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다. 어차피 컴퓨터, TV, 스마트 폰을 끼고 사는 현대인에게 시력 저하는 피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의 경우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내 딸이 난시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난시라는 진단을 친구는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내 충격은 딸에 대한 죄책감과 한없는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그 친구도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난시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필 어린이집에 등록하기 위해 찾아간 날, 딸이 난시 교정용 안경을 쓴 채로 생활하다 다칠 수도 있다며 완곡하게 등록을 거절당하기도 했기에 낙담은 더욱 커졌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한동안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 한다. 마치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이 딸이 난시인 것을 알고, 무책임한 엄마를 손가락질할 것만 같아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그렇게 아파트 통로에서 아내를 마주치자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고, 평소와 다른 모습에 안부를 묻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도 난시란 진단은 안경점에서 가끔 듣는,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는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딸 아이가 난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마음 안에서 단순한 진단명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날 이후론 사랑스런 딸의 재롱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눈에만 신경이 쓰였더랬다. 또 멀리서 엄마를 발견하고 신이 나 뛰어오는 딸의 모습을 보며, 이전과 다르게 마치 눈 부분만 선명하게 확대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터널 시야’(tunnel vision)라 하는데, 사물을 판단하는 데 있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작은 부분에만 천착하게 되는 현상이다. 터널 시야에서처럼 특정 부분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집중하게 된다면, 상황과 현상 전체의 맥락(context)을 놓치게 된다. 맥락을 놓친 사고는 점입가경, 부정적인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 쉽다. 자신이 난시를 앓았었다는 사실, 난시는 유전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널 시야와 맞물려 생각의 품을 좁히고 엄마의 죄책감을 더욱 부추겼으리라. 


다, 내 책임이야. 내 잘못이야.
 

 결국 아이의 난시는 자신의 마음속에선 온전히 엄마 탓이 되어버렸고, 한동안 꽤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비단 아내의 친구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의 결점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유전된다’는 말은 언뜻 듣기에 모든 면에서 다 통용되는 마법 같은 단어다. 아이가 공부에 흥미가 없거나, 키가 작거나, 예민한 성격을 가진 것도 모두 모두 부모의 탓, 유전의 힘이라 여긴다. 내 몹쓸(?) 유전자 탓에 이제 막 꽃봉오리를 틔우려 하는 아이 인생을 벌써 결정지어버린 것만 같아 부모의 마음은 아이가 크는 내내 무거워진다. 단순히 외모나 학업의 문제라면 다행이지만, 어린 나이에 병을 앓게 된다면, 그리고 그 질병이 부모가 과거 앓았던 질병과 비슷한 부류라면 마치 가슴 위에 뜨겁고 무거운 불덩이를 올려놓은 마냥 아이와의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하지만, 우리는 ‘유전된다’는 말을 좀 더 잘 들여다봐야 한다. 대개 유전을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멘델의 유전법칙처럼 명쾌하고도 강력한 법칙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에서 대를 이어 내려가는 유전 정보들은 상상 이상으로 그 수가 많고 복잡하다. 또, 부모의 특징이 아이에게서 발현되는 데도 셀 수 없을만큼 많은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유전자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생긴 돌연변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변수 중 하나다. 그러니 부모의 특정한 특징이 ‘유전된다’는 것보다, 그러한 특징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유전된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또, 부모가 물려준 가능성에 악의는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유전자를 절반씩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이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부모의 탓은 결코 아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물려주었을 뿐이다. 아이가 가진 불씨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특정 조건과 만나 발화하는 것일 뿐, 그 모든 것을 부모가 통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지나친 죄책감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 독()이다. ‘터널 시야’는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하는 현재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난시처럼, 아이는 크게 의식하지 않는데도 부모가 근거 없이 느끼는 죄책감은 더욱 그러하다. 내 아이가 티 하나 없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가 같을 게다. 하지만 아이에게 생긴 예기치 못한 문제들을 모두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이에게 단지 ‘가능성’을 주었을 뿐이며, 우리가 그랬듯 아이는 부모의 기대와 염려대로만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 않나. 부모는 불씨가 크게 번지지 않도록 든든하게 선 바람막이,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혹 아이에게 생긴 문제가 부모와 일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책과 죄책감은 아이와 함께 하는 행복해야 할 삶을 암흑으로 만들 뿐이다. 지나간 일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도 없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영역에서의 최선이 필요하다. 또, 최선 안에 끝없는 자책과 후회는 포함되지 않을 테다. 


 글을 쓰며 한 달에 한 번, 진료실을 찾는 모녀가 떠올랐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마흔이 넘은 딸은 아이처럼 순수하기만 하다. 옆에 앉은 모친은 딸의 말 끝마다 가로막으며, 연신 ‘내 피가 더러워서…’라고 이야기한다. 딸이 조현병에 걸린 것, 결혼하지 않고 여태 직업도 없이 노모와 함께 사는 것 모두 자신의 탓이라는 거다. 환자의 어머니는 딸이 아픈 뒤에는 모든 것을 다 놓고 아이의 손발이 되어 살아왔다고 한다. 노모는 평생을 그렇게 자책하며 마음의 불덩이를 안고 살아왔을 테다.  부모의 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자녀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이 부모의 삶의 반경도 극히 좁아지게 만드는 안타까운 경우다. 



 혹 자신이 아이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이 있다면, 나 자신이 아이의 삶을 더 옥죄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는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해주는 창조주이며, 아이를 둘러싼 세상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자신의 문제로 부모가 자책하는 모습에 아이 또한 초조해지고, 결국 화살을 자신에게 돌려 자신의 결점에 대한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자책과 죄책감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또, 온전한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맥락없는 삶은 부모와 아이 양쪽 모두에게 불행일 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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