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째와 둘째 사이_아빠
오늘은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지 17주 되는 날이다. 아니, 산부인과에서는 정확하게는 17주 0일이라고 부르더라. 첫 임신과는 달리, 엄마의 입덧이 잦아들면서 우리 ‘나무’(태명)는 첫 째 아이의 성장에 대한 경이와 가끔 터지는 재롱 속에 미안하게도 잊혔다. 가끔 첫째 아이가 엄마의 배 위를 올라탈 때, 겨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이 상기되곤 했을 정도로.
산모들은 대개 임신 초기가 지나고, 15주-20주 경이 되어 정기검진을 받을 때면 긴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의사가 은밀히 알려주는 아이의 성별 때문이다. 현행법에서는, 의료인은 태아의 성별을 32주 전 미리 알려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나마 헌법 소원을 통해 바뀐 것이 32주이다.) 대개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 시기즈음의 산모들이 초음파 화면에 집중하는 눈빛을 읽고는 은근히 ‘아이가 장군감이네요.’ 혹은 ‘분홍 옷을 준비하면 좋겠어요.’ 라는 식의 표현으로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에둘러 이야기하곤 한다.
아내는 어제부터 분주했고, 긴장되어 보였다. 첫 아이가 딸인 것이 죄도 아닌데, 나의 부친과 모친, 아니 모든 주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아들 하나 더 낳으면 되겠네.’ 라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는 것이 못내 마음에 박혔던 모양이다. 무심한 남편은 한 귀로 인사치레처럼 흘려 듣지만, 당사자는 그러지 못했나보다.
“나, (둘째 성별로) 비난받기 싫어.”
아내는 며칠 전부터 안 하던 말을 한다. 외동으로 자라나, 30여년의 세월 동안 가족들의 바람대로 반듯하게 커온 아내이기에 다른 이들의 기대를 져버리는 역적(?)행위가 많이 불편하기 때문이리라.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다른데. 아들과 딸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그저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 일일 뿐인데. 아내의 바보처럼 착한 마음이 다칠까,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진다. 그저 ‘신경쓰지마.’ 라는 말로 되도록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다른 이들보다도 아내의 실망이 더 걱정이다. 미리 여행이라도 가서 같이 이야기를 좀 나눌것 그랬나 싶다.
3시 46분. 아내의 전화가 울린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만큼 높이 쌓은 차트를 정신없이 정리하고 있을 무렵, 아내의 이름이 점멸하는 전화를 바라보며 순간 가슴이 쿵, 한다. 설마…? 그리고 떠오르는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나쁜 소식이라면 아이의 건강, 이 전에 했던 기형아 검사, 그리고....
“여보세요?”
아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도 덩달아 약간의 안심과 더불어 담담해진다.
“응.”
응. 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가는 느낌.
“ 아기가, 글쎄 어찌나 배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선생님이 도무지 가랑이 사이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가 않는대. 거기다 탯줄도 가리고 있고, 양반다리 까지 하고 있어서, 뭐가 있는지 모르겠대나봐. 내가 딸이라서 그런가보죠, 했더니 정말 잘 안보여서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하네. 또 4주 기다려야 하나봐.”
긴장되는 순간이 일단은 4주 연기되었다는 이야기에 우습게도 마음이 놓인다. 아내도 피식 웃으면서 가벼운 말투로 말하는 모양새다. 나도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진다. 조삼모사겠지만, 그리고 어차피 이미 정해진 일을 4주 뒤에 통보받을 뿐이겠지만, 이 작은 이벤트가 싱겁게 끝난데 다행감이 드는 것이 나도 어지간히 신경을 썼었구나 싶다.
그리고는 쉽게 사람들이 건네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인사처럼 건네는 말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래, 공부는 잘 하고?’이고, 대학에 들어가면 ‘취직은 어디로 할거니? 요즘 취업이 어렵다던데.’, 그리고 기껏 취업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나이도 찼는데 대체 장가는 언제 갈거니?’라는 말들로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참 예쁘고 귀한 딸을 낳아 감사하며 기르는 부부에게, ‘아들도 낳으면 딱 되겠네. 언제 가질거야?’ 라는 말은, 카드로 한 층씩 겨우 조심스레 쌓아올린 탑을 툭 건드려 무너뜨리게 만드는 것처럼 무섭도록 폭력적이다. 잔잔한 호수에 무심코 돌은 던진 이는 호수의 일렁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입은 이의 마음은 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