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브랜딩 전문가는 무엇이 다를까? (4)
- 하라켄야(Hara Kenya)
브랜딩에서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는 글을 썼지만, 브랜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분명 중요한 역량이다. 굳이 언급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을 만큼 기본적인. 디자인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의 디자인 퀄리티를 살펴 보면 평균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현실이다. 전국에 무수한 음식점이 있지만 모수 서울과 같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드문 것과 같다. 브랜드 디자이너라고 하면 보통 로고와 같은 시각적 자산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모든 브랜드 디자이너들에게는 수준 이상의 디자인 퀄리티가 요구된다. 하지만 디자인만으로 브랜드 디자이너의 가치를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정말 실력이 있는 브랜드 디자이너들은 클라이언트 기업의 임원들이 고민하는 브랜드 방향성을 명확한 컨셉과 내러티브로 풀어낸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렇듯 브랜드 디자인 업계 역시 상위 10%의 브랜드 디자이너와 나머지 90%로 구별된다. 두 그룹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굵직한 브랜딩 프로젝트에 참여 요청을 받고 보면, 매번 늘 만나던 에이전시들과 경쟁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기업의 미래 사업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길 정도로 실력 있는 브랜딩 에이전시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말이다. 기업에서 브랜드 디자인에 큰 비용을 투자하는 것은 디자인 그 자체가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디자인의 심미성은 당연히 중요한 선정 기준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력을 살피게 된다. 브랜드와 시장 현황, 소비자 니즈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해석하는 능력에 따라 산출물의 가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업들이 브랜드를 위한 디자인 프로젝트에 창조적인 디자이너보다 가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브랜딩 전문가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프랜차이즈 레스토랑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기대하는 역할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에이전시에 기대하는 역할이 다른 것이다.
최상위의 브랜드 디자이너들은 브랜드의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다. 하라 켄야와 같은 이들의 브랜딩 프로젝트를 단순히 비주얼로 평가하는 것은 브랜드 디자이너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하라 켄야가 리뉴얼한 샤오미의 로고를 보고 3억이라는 돈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업의 방향성을 구체적 상징으로 구현하고 기업 구성원과 고객들에게 샤오미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전했다는 점에서 보면 3억은 큰 비용이 아니다. 나는 샤오미의 로고를 보며 하라 켄야는 정말 브랜드에 대한 감도가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샤오미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에서 미래의 성장을 견인할 가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야로 기업의 미래 가치를 통찰했다. 이것이야말로 브랜드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브랜드 감도이다. 아무리 뛰어난 시각적 자산을 디자인해도 가치에 대한 감도가 부족하면 무의미하다.
브랜드 디자인에는 브랜드의 미래 가치를 실현하는데 적합한 시각적 자산을 기획하고 구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브랜드 디자인에 있어서 디자이너들이 만나게 되는 벽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뛰어난 브랜드 디자인들이다. 눈으로 인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브랜드 가치를 눈에 보이는 시각적 자산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필연적으로 표현의 한계를 만나게 된다. 브랜드 가치는 아무리 뾰족하더라도 유사한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가치의 표현 역시 독창적이기 어렵다. 나름의 고민 끝에 개발한 디자인은 이미 유명한 브랜드 에이전시의 전문가들이 오래전에 사용했던 표현이고, 어떤 경우는 기획 의도나 표현의 디테일까지 유사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브랜드 경험이 성숙해진 지금에 와서는 유사성의 벽이 더욱 두터워졌다. 기존에 존재하는 브랜드 디자인 자산들의 퀄리티와 완성도를 뚫고 그 이상의 임팩트를 주는 일. 단순한 시각적 자산을 넘어 기업의 비전을 실현하는 일. 그게 최상위의 브랜드 디자이너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렇다면 벽을 돌파한 디자인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브랜드 디자이너라면 대략의 기획 의도와 시각적 자산 한 두 개만 봐도 프로젝트의 퀄리티와 디자이너의 수준을 측량할 수 있다. 심지어 어느 유명 브랜딩 에이전시 대표는 채용 과정에서 포트폴리오 표지만 보고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고, 반대로 열 가지 방면에서 탁월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벽을 뚫어본 경험이 있다면 다른 벽도 돌파할 잠재력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 국내를 대표하는 에이전시의 디렉터 혹은 시니어 디자이너들은 이미 대학생 혹은 주니어 시절부터 벽을 넘어서는 경험을 해봤다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보이는 탁월함은 디자인에 대한 깊은 고민과 집요한 실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훌륭한 브랜드 디자인은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를 고유한 질감으로 풀어낸다. 그것이 아주 단순한 형태나 그래픽으로 표현되었을지라도 실상 그 단순함에는 세심한 고민과 무수한 실험, 정교한 디테일 녹아있다. 벽을 넘어서 브랜드 가치 그 자체가 되는 훌륭한 디자인이란 대부분 그런 특징을 갖는다. 지금의 나는 업계 최고의 브랜딩 에이전시를 경험한 클라이언트들이 다시 프로젝트를 의뢰할 만큼 실력과 퀄리티를 인정받았고,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브랜딩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면 매번 표현의 한계와 유사성의 벽을 돌파해야 하는 고통을 겪는다. 고유의 내러티브와 디자인으로 한계를 돌파한 프로젝트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서는 이유이다. 설사 전반의 완성도는 다소 아쉽더라도 유사한 표현에 갇힌 디자인들과 구별되는 시각적 자산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다.
일단 브랜드 디자인 실력을 제대로 검증하고 싶다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동료들이 아니라 업계를 리드하는 전문가의 평가를 받는 것이 좋다. 대학생 시절 내 디자인 실력을 객관화하기 위해 글로벌 디자인 플랫폼에 진행했던 디자인 프로젝트를 업로드했다. 지금 보면 그렇게 대단히 뛰어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지만, 브랜드 디자인 자체의 섬세함과 퀄리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였다. 국내외의 디자이너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유명 에이전시 대표가 해당 프로젝트를 스크랩했다. 그 후 펜타그램의 시니어 디자이너를 포함해 평소 내가 눈여겨 봤던 에이전시들의 시니어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내 작품을 좋게 평가하고, 스크랩하는 것을 보며 내 디자인의 퀄리티가 나쁘지 않았구나 싶은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이제 막 업계로 진출한 신입에게 유명 프로젝트들을 리드했던 전문가들의 평가는 큰 격려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이 굵직한 에이전시와 경쟁에서 이겼던 힘이라고 생각한다.
상위 10%에게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말하는 까닭은 전문가로서의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상위 10%는 어쩌면 상징적인 수치이다. 업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보기에 좋은 브랜드 디자인을 했다면 보통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클라이언트 기업의 실무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나아가 업계를 리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브랜드 디자이너로서의 다음 레벨인 브랜드 가치에 대한 감도와 통찰력을 기르기 이전에 가장 기본 소양인 디자인 실력을 높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디자인을 못하는데 통찰력과 감도가 뛰어난 브랜드 디자이너는 존재할 수 없다. 요리 실력이 없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셰프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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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의 시대, 디자인은 브랜딩이 될 수 있을까?(2) : 좋은 브랜딩은 무엇이 다를까? (1)
브랜딩의 시대, 디자인은 브랜딩이 될 수 있을까?(2) : 좋은 브랜딩은 무엇이 다를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