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노출증 환자가 되다

사노 요코의《사는 게 뭐라고》를 읽은 후 쓴 일기

by 느리게걷는여자

***누군가 작가는 '생각 노출증 환자'라더군요. 그렇다면 글 쓰는 일은 '생각 노출증'입니다.
이 글은 '서평'보다는 '일기'이기 때문에 노출 수위가 높습니다. 부담스럽거나 버거우신 분들은 skip해주시길 바랍니다.^^~


2016. 4. 8일. 흐린 후 갬


시집을 읽고 나면 시를 쓰고 싶고, 에세이집을 읽고 나면 에세이를 쓰고 싶다. 모든 글이 그런 건 아니다. 잘 쓴 글을 읽었을 때에만 그렇다.

며칠 전, 남편이 술 취한 객기로 29만원을 긁고 왔다. 중소기업 외벌이로 대출금 갚아가며 빠듯한 살림살이에 지쳐있던 나는 그 사건에 매우 분노하였으며, 우편물 속의 29만원이 찍힌 카드 명세서를 월초에 다시 받아보자 또다시 우울 속으로 침잠해 들었다. 그래서 연륜 깊은 인생선배에게 조언 받고 싶은 마음에, 읽고 있던 스탕달의 장편 소설 《적과 흑》을 잠시 접어놓고,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라는 에세이를 펴들었다. 60대 중반 부터 한차례 암투병과 시한부 선고를 받은 5년 동안의 일기를 엮어놓은 책으로 요코 할머니는 2010년 72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셨다. 요약해 놓고 나니 왠지 암투병기에 관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암' 이야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치매나 류마티스처럼 긴 고통으로 연명해 가야하는 병보다 암에 걸려 죽게되는 것에 요코 할머니는 안도한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일제의 패전으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 요코 할머니는 영양실조가 원인인 오빠와 동생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사는 게 뭐라고'는 제목처럼 삶도, 사랑도, 죽음도, 젊음도, 늙음도 고매한 이상이나 의미부여의 군더더기 없이 담박한 맛을 지닌다. 지극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산꼭대기에서 삶을 관망하고 있는 할머니의 여유라 할까? 내가 34년 짧은 생 살아본 느낌으로는 삶은 쓰거나 밍밍한 맛 위에 어쩌다 맛보는 단맛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기에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란 참 괴롭다. 하지만 요코할머니의 경쾌한 필체는 쓰거나 밍밍한 맛도 맛있게 먹여주는 역할을 한다. 맛있게 먹은 음식은 식후에도 좋은 기분이 남듯이 요코 할머니의 책 또한 읽고 나서도 좋은 여운을 갖게 했다. 치매를 걱정하는 프리랜서 작가 독거노인의 일상은 '긍정'을 세뇌하는 자기계발서 보다 훨씬 삶에 대한 건강한 용기를 주는 힘이 있었다.

요코 할머니는 내 노년기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나도 자식이 있지만 각자의 삶을 영위하도록 (행여 술담배 좋아하는 남편이 먼저 저세상에 가더라도)독거를 택할 것이며, 소소한 일거리라도 하며 숨 붙어 있는 날까지 스스로 밥지어먹는 독립심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무엇보다 소소한 일거리가 '글 쓰는 일'이 되길 희망한다.

내가 '글 쓰는 일을 할거야'라고 결심하게 된 것은 33살 때, 이제 일 년 지났다. 작년 이맘때쯤, 강신주 박사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철학이라는 신세계를 접하던 중이었고 계획하고 있던 제주도 여행에 설레어 잠 못 이루던 밤, 생각이 통통 튀어 '내가 전업주부 말고 앞으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지점까지 닿게 되었다. 그 통통 튄 우연이, 이과고등학교-공대-리서치회사를 통해 수년간 숫자와 보고서에 익숙해진 뇌를 '인문학적' 인간으로 전향 시키게끔 만들었다. 그나마 행운(?)이었던 것은 내가 스무 살 때, 아빠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새 삶을 찾아 나선 엄마가 거의 유일하게 짐 가방에 꾸려 넣지 않고 남겨놓으신 책장에 있던 몇몇 '고전서'들 덕에 어렴풋하게나마 인문학적 씨앗을 뇌 안에 약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엄마의 유품(?)같은 흔적을 그리워하며 읽게 된 조지오웰의 《1984》라든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등의 고전들은, 갓 스무 살 넘긴 앳된 나이에 아빠에게 시집와서 15년을 전업주부만 하셨던 엄마의 책장에서 발견된 신선한 놀라움이자 행운이었다. 생각해보니 학창시절 사회 과목은 반에서 항상 두각을 나타냈으며 중고등 학교 때는 세계사나 사회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희망도 잠깐 품었었다. 대학생일 때도 공대생이었지만 가끔 사회과학 계열의 수업을 이방인처럼 수강하기도 했었다.

인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난 1년, 아이가 어린이집 가거나 잠들었을 때, 버스 탔을 때의 남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8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주로 인문학 개론서 위주의 독서와 난생처음 '시집'이란 것도 읽게 되었다. 클림트의 《여성의 세시기》라는 작품의 일부인《엄마와 아기》라는 직소퍼즐 그림을 보고, 그림 보는 것에도 흥미가 생기면서 미술사에도 관심이 갔다. 화가들의 글을 보면 어쩜 이리도 철학적일까 하며 놀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학사와 철학사가 같은 얼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철학은 개론이나 철학사와 같은 통론으로 공부할 땐 무척이나 흥미로운데, 막상 각론을 공부할 때면 졸음이 오곤 한다.

이런 내가 인문학을 공부할 자격이 있는지 때때로 의심이 가기도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때때로 내가 쓴 글들을 나중에 읽어 보고나면 이런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이제 1년이다. 겨우 1년으로 재능을 판가름 하려는 조급증은 참 어리석다.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그 어리석음에 때때로 속앓이 하는 내가 한심스럽고 밉다. 또한 글 쓰는 일이 자신을 드러내야하는 일임을 알게 될 수록 소심한 나는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내 글을 누군가에게 드러내고 공감 받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생각 노출증 환자'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재능과 관계없이, 독서는 참 즐겁다. '앎'은 드라마나 수다보다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쓰고 싶은 글을 집중해서 쓰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고 있는 내모습도 참 좋다.

-장이: 그것과 관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쟁이: 1.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2그것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쓴다)

나는 글장이가 되고픈 것일까? 글쟁이가 되고픈 것일까? 칼럼이나 에세이 작가가 되고픈 것일까? 시인이 되고픈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단 한 가지,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글은 '팔고'싶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사노 요코 할머니처럼 나도 일기 한 번 써봤다. 앞으로도 가끔 읽기를 써야겠다.

P.S 요코 할머니와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노년기가 되어도, 체게바라의 말처럼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 품고 사는 리얼리스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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