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with M
2022년 12월 2일,
조금씩 빠지는 머리와 시니컬한 성격을
내게 선물해 주었던 애증의 회사를 그만두었다.
재직 중 정시퇴근은 꿈도 못 꾸었으며
휴일까지 해외공장과 바이어들에게
시달리는 인생을 살았었다.
이로 인해 건강과 성격을 버렸지만
좋은 동료들과 노련함을 얻어서 후회는 없다.
모든 직장인들이 꿈꾸는 사직서 한 장
그리고 동료들과의 슬프지만 행복한 작별인사를
에어프랑스 왕복권과 교환하며 자리를 박차 나왔다.
회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시 혼자가 된 나는 둥지에서 떨어진
못생긴 아기 비둘기의 모습을 보였지만
묵묵히 나의 편이 되어준 여자친구 M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사실 퇴사 1년 전부터
M과 합의하에 비슷한 시기에 퇴사하여
한 달 동안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하기로 결심했었다.
항상 혼자 거지처럼 배낭여행을 다니다가
예전부터 꿈꿔 왔던 단짝과의 여행계획은
나의 파란만장한 회사생활을 지탱해 주었던 목발이었다.
아침 8시 30분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출국 전날 포르투갈전의 극적인 승리를 기점으로
다른 국가들의 월드컵을 연달아 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것 같다.
새벽 4시
12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널브러져 있는 캐리어숲을 헤쳐나가
간단하게 얼굴을 적시고 조용히 M과 집을 나섰다.
고요하고 차가운 바람,
청소차의 소리,
그리고 바퀴 한쪽이 고장 나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허름한 아메리칸 스탠더드 캐리어 소리만이
우리를 감쌌다.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하여
만 원짜리 김치 칼국수를 입에 쏟아부으며
탑승을 기다렸고
쾌적한 화장실에 들어가 거사를 치르고 나서야
집합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4~5번의 유체이탈 이후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의 2번째 방문이었다.
능수능란하게 짐을 찾고
복잡한 노선들 속 정확하게 메트로에 탑승하여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숙소로 향하는
듬직한 나의 모습을
M에게 보여주는 각본을 수 없이
머리로 구상했지만
각본만 만들어졌을 뿐 영화로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나만 바라봐주고 의지했던 M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M은 그저 눈웃음을 지어주면서
긴장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쨌든 메트로의 바퀴는 굴러갔고
나의 자신감도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숙소가 위치한 클리시역 (place de clichy)에
내리자마자 사우나에서 많이 맞아본
이슬비가 푸석푸석 내렸다. 그리고
클리셰로 가득 찬 파리의 건물들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옆에 조그마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졸졸 따라오던 M의
희둥그레한 눈과 분홍 소시지 같은 입은
이미 이곳의 분위기에 지배된 듯 보였다.
파리지앵 특유의 자부심과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 저녁과 밤의 경계선쯤,
파리의 노을이 도시에 색감을 입혀줘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M과 근처 베트남 식당에서
치킨라이스와 고수가 듬뿍 들어간 볶음밥을 먹고
거리를 나와 산책을 했다.
골목골목 트렌디하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했으며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은 파리의 밤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골목을 걷던 도중,
술에 흠뻑 취한 노숙자가 내 몸에 손을 댔다.
중얼중얼..
인류의 멸망을 외치는
종교 개혁가처럼 나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M은 우렁찬 목소리로
'헤이 노타치 노타치'를 연발하며
성난 황소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노숙자는 곧바로 손바닥 제스처와 함께 사과했고,
M은 벌판에서 곰을 잡은 사냥꾼의 표정을 지으며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싸구려 모텔방 같은 호텔에 묵었다.
하지만 그 가격은 비수기 때의 하얏트 호텔과 맞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M에게 너무 미안하다.
최소비용 최대효과 배낭여행정신을
M에게 가스라이팅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내 걱정과는 달리 M은 행복해 보였고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단 사진을 스머프 3등신으로 찍어서
항상 그녀는 뿔이 나있었으며
둔한 나는 M의 분노 원인을
싸구려 호텔에서의 숙박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아침 7시
여전히 흐린 날씨, 해가 아직 완전히 뜨지 않은 하늘 아래
3층에 위치한 작은 호텔 식당으로 내려와
흑인 요리사분의 고요한 아침인사와 함께
분홍빛 가득한 잠봉과 살라미,
바짝 구운 토스트,
평소에 먹지도 않는 복숭아 맛 요플레,
입천장 까질 것 같은 수제잼
그리고 괜히 새끼손가락 치켜세우며
마시는 따뜻한 블랙커피로 새벽을 맞이했다.
이후 에펠탑, 개선문, 샹젤리제, 와인, 재즈
그리고 에스카르고가 아닌
나바호, 터키석, 웨스턴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이 즐비한 가게로 향했다.
길을 거닐며 보이는 이곳의 아름다운 광경보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옆 사람의 눈을 더 많이 바라봤던 하루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