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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계절

40대, 흔들리며 피어나다.

by 라이언윤

청량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싱그러운 초록이 골목마다 번져드는 계절.

그런 시간이 오면

우리는 어김없이 여름휴가를 떠난다.


발코니 너머로 아른거리는 바다,

소파 앞에서 조용히 책을 넘기는 딸아이의 모습

그 모든 것이 풍경처럼 펼쳐진 어느 오후.

그 순간, 내 안에서 묵직한 감정 하나가 올라왔다.


“이게 바로 인생의 행복 아닐까.”


소유도, 성취도, 그 무엇도 아닌

지금 이 평화로운 장면 하나가

내 인생 전체를 조용히 위로하고 있었다.


———


남해에서, 오래된 미래를 만나다


올해의 여름은 남해에서 보냈다.


봄에 방문한 벚꽃 여행이 아름다워,

그 계절에 머물렀던 감정을 여름까지 연장해 보기로

한 것이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다.


남해는 계절에 따라 얼굴이 달라진다.


봄엔 벚꽃이 흩날리는 낭만이 있고,

여름엔 햇빛과 소금기가 섞인 바람이

벼 잎 사이를 누비며 초록을 노래한다.

그러니 이번 여정도 그저 풍경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 여행이 진짜 값졌던 이유는

한 사람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은퇴 후,

남해로 내려와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달빛가게’의 사장님.

책을 고르던 우리 가족에게

다정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차 한 잔 하고 가시죠.”


첫 번째 제안은 조심스럽게 넘겼고,

두 번째 권유는 웃으며 사양했다.

그러나 세 번째 권유 앞에서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은 가끔,

이런 작고 조용한 선택이 커다란 장면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차 한 잔’의 철학


다다미방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말보다 ‘삶’으로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서울에서의 삶, 부모로서의 역할,

그리고 이제는 자신으로 존재하는 삶.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귀촌이 아니었다.

그는 도시의 질서와 ‘정상성’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신만의 온도로 살아가는 결정의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전시회를 열고, 책방을 공동체로 확장하고,

속도를 늦추며 풍요로움을 다시 배운 사람.


나는 그에게서

‘20년 뒤의 나’를 보았다.

단지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걷고 있는 모습 말이다.



인간은 왜 사랑을 조건화하는가


가장 깊이 와닿은 말은 이것이었다.


“부모가 떠난 뒤에야, 나는 진정한 자유를 찾았어요.”


그 말은 고요했지만,

묵직하게 내 안의 기억들을 휘저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사실은 그 사랑을 빌미로

자신의 세계를 기대하고, 설계하고, 요구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 말 뒤엔 늘 숨어 있는 청구서가 있다.

그리고 자식은 그것을 빚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부모의 그림자 아래 접는다.


나는 그 순간, 질문을 던졌다.

“과연 우리는 정말 ‘이타적’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단순함으로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답은 단순함에 있다.


행동경제학, 심리학, 자아이론 all fine.

하지만 그런 해석 이전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아간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사랑하며.

그 단순함을 잊지 않는 삶.

그게 어쩌면 진짜 사랑이고, 진짜 자유 아닐까.


자식이 자신의 색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부모는 조언자가 아닌 빛이 되어야 한다.

길을 가리키기보다 길 위를 함께 걸어주는 존재.

그래야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진다.



내가 꿈꾸는 은퇴 이후의 장면


내가 그리고 싶은 은퇴 후의 삶은

큰 집도, 유명세도 아니다.


작은 책방, 다다미방, 차 한 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조금 앉아서 이야기 나누고 가시죠.”


그 대화 속에서,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불빛 하나 켜질 수 있다면,

그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성장, 자식의 성장,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회복.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성장 조건’이 되며 살아간다.


그리고 남해의 여름,

그 모든 사유와 감정은 이 말 한 줄로

마무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삶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 그 여름 남해를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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