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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요 Mar 02. 2021

니니의 집

더러워지지 않는 안경알이 가지고 싶어.

"가지고 싶은 게 있어."




니니가 잣죽을 후후 불며 말했다. "더러워지지 않는 안경." 후룹 소리를 내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정확히는 더러워지지 않는 안경알이 갖고 싶어." 니니의 안경에 김이 서려있었다. 뿌연 안경알 밑의 굳은 입매가 우스워 보였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니니는 안경을 벗고 먹으면 자신의 수저에 있는 것이 잣인지 죽인지 구분할 수 없다며 눈을 흘겼다. 그마저도 우스웠다. 김 사이로 그릇을 바라보며 열심히 수저질했다. "잘 보이는 눈으로 장조림도 드세요.", "잣죽이랑 안 어울려. 바보야." 니니는 김치를 집어 먹었다.




니니의 새 아파트 바로 앞에는 산이 하나 있었다. 모두들 뒷산이라고 부르는 산이었는데, 아파트 주차장과 이어진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바로 다람쥐나 청설모를 만날 수 있었다. 니니는 소나무 전경을 보고 이 집을 샀다. 눈 쌓인 풍경은 더 아름다울 거라고 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우리 집 갈 생각을 해야지." 하면서도, 나는 곧장 "눈 쌓인 산, 이쁘겠네." 했다. 장갑을 낀 할머니가 도토리와 밤, 그리고 솔잎을 가득히 주워 담고 내려오고 있었다. 담배를 끄며, 눈인사를 했다. 시선을 돌려 나무들을 봤다. 소나무보다 밤나무가 더 많아 보였다. 공기가 맑았다.




모든 게 버거워진 니니에게 주방은 물을 따르고 음식을 데우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는 배달이 되지 않는 시내의 한 죽집의 죽이 먹고 싶다며 전화를 했다. 점점 소화가 되지 않으니, 상비약처럼 죽을 두겠다는 게 니니의 의견이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을 테니 넉넉히 사 오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무슨 죽으로 사오느냐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고, 생각보다 가까웠다. 주말마다 그 생각을 반복했다. 니니에게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쉽다고.




"걱정 마세요. 뭘 또 보내. 응. 알았어. 추석 잘 쇠시고." 엄마는 니니보다도 내 걱정을 했다. 나이를 먹으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절에 가서 우리 아들 홀애비 되지 말라고 기도를 드렸다며 안심하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집에 뭘 보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부모님 선물은 니니가 챙겨왔다. 회사에서 주는 추석 선물 세트를 부모님 집으로 보내고, 현금을 좀 넉넉히 보내야겠다. 넉넉한 죽의 양을 아직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근접했다며 소리를 냈다.




죽을 다 사고 출발하니, 니니의 집에 커피가 없다는 게 기억났다. 집 근처 마트에는 내가 먹는 커피가 없어서 미리 사놔야 했다. 맞은 편에 편의점이 보이는데 꺾는 곳이 애매했다. 신호등 쪽에 차를 세워 편의점을 향해 걷는데, 웬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총각, 현대 아파트 총각 맞지?" 가판대에서 내게 손짓하는데 연기가 나는 솥에 누군지 보이질 않았다. "송편 안 필요혀?" 연기가 나는 솥에 송편들이 들어있었다. 커다랗고 못생긴, 초록색 송편 밑에 솔잎들이 깔린 걸 보고 깨달았다. 그 할머니로군. 저래서 솔을 많이도 주워갔구나 싶었다. "서울 양반인 것 같은데, 고향이 이쪽인가?", "아, 예. 송편 고물은 뭐예요?", "얘는 밤송편이여. 몸에도 좋아. 근데, 주말 부부?", "뭐, 그렇죠. 한 팩 주세요.", "그래, 잘 선택하셨어. 아, 이것도 좀 챙겨줄게. 이웃사촌인데. 두고 먹어." 삶은 밤이었다.




생각보다 늦게 아파트에 도착했다. 겸사겸사 약국도 들러서 소화제를 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반기는 소리가 없다. 식탁에 짐을 두고, 안방 문을 열었다. 니니는 티브이를 켠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못 보던 게 있었다. 택배 박스가 있더니, 저건가 하고 보니 김 서림 방지 안경 닦이었다. 뒷면에는 '6개월 사용 가능'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니니는 여전히 태평했다. 누워있는 그를 깨우고 싶은 욕망과 그의 숨소리와 카랑카랑한 연예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고 싶은 욕망이 함께 차올랐다. 훗날을 대비해 연차를 아껴야 했지만, 내년 정월 날은 니니와 함께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몸을 구겨 그의 옆에 누우니, 니니가 짜증 어린 소리를 냈다. 내일은 니니와 함께 뒷산에 올라 밤을 주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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