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취향껏 15호 <이사>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집’이 일상의 상처와 기억이 담긴 공간일 수 있기에, 요즘 사람들은 호캉스를 선호한다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가 참 마음에 와 닿았다. 나에게 집이라는 건 참 애증의 공간이다. 아주 사소한 고민들과 무거운 시름도, 가장 행복했던 기억도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감정들이 내가 살던 집에 여러 가지 색깔을 만들어냈다. 오늘은 그 기억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집’이라는 공간은, 말하자면 개나리처럼 환한 노란색으로 남아있다. 방이 두 개인 작은 집이었는데, 집 근처에는 부모님 친구들이 살고 계셨다. 나랑 엇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소꿉친구들이 있었고 우리 세 가족은 늘 모여서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소꿉친구에 집에 놀러 가면 우리는 커다란 침대에 셋이 누워서 옹기종기 놀다가 잠이 들었다. 어른들은 술을 마시며 떠들다가, 밤이 되면 잠든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서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서울대공원에 자주 놀러갔었고, 그때 찍은 사진이 꽤 귀여워서 자주 열어본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이 수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소꿉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우리가 계속 같은 동네에 살았다면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했던 우리가 여전히 친구였을까. 아니면 뜻하지 않게 멀어졌을까.
수원으로 이사를 와서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꼭대기 층에, 여섯 식구가 모여 살았다. 이사 한 날에는 시루떡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 빌라에 사는 모든 어른들과 아이들을 알았다. 딸이 셋이라 우당탕탕 시끄러운 우리 집에, 층간소음 때문에 올라왔던 아랫집 이모와도 절친이 되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없는 날에는 201 호에 가서 언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심지어 빌라 건너편 주택에 사는 어른들과 아이 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가끔은 동네 슈퍼에서 외상을 하기도 했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인영아, 엄마가 너를 찾더라-하는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 들어갔다. 나는 할머니가 키워줬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나를 키운 건 그 동네 전체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사를 다니는 것이 참 좋았다. 왜냐하면 정리가 안 된 방을 한 번에 청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새로운 공간을 마주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는 이사를 다니는 게 싫다고 했다. 그의 소원은 늘 ‘자기 집’을 갖는 것이었다.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졌던 집을 생각하면 나는 늘 눈물이 난다. 도대체 그깟 집이 뭘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기억 속 첫 집은 어렸던 내가 생각하기에도 작았으니 10평 안팎이었을 것이다. 수원에서의 첫 집은 18평짜리였다. 그 다음에는 20평대, 마침내 30평대 ‘우리 집’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집이 커질수록 가족은 멀어졌다.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결국은 그 집을 두고 떠났다. 엄마의 소원이라던 그 집에는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는 커다란 거실이 싫었고, 넓은 방이 싫었다. 집에 올 때마다 불이 꺼져있는 집이 끔찍해서 울었다. 나는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양이를 들였다. 키오가 혼자 외로울까봐 피노를 들였다. 고양이 두 마리와 아빠와 나. 잠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집의 다른 이름은 돈이다. 엄마의 소원이었던 그 집은 엄마의 것이기도, 아빠의 것이기도 했다. 집의 다른 이름은 돈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고양이들을 보내줘야 했다. 나는 그날 밤 지하주차장에서 엉엉 울었다. 잠결에도 일어나 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울었다. 엄마를, 아빠를, 할머니를, 동생 둘과, 고양이 둘을 모두 잃어버린 집이었다.
잃어버린걸까. 버린걸까. 가끔 나한테 묻는다.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사를 가기 전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는 그냥 작은 집에 살면 좋겠어. 아빠랑 나랑 둘이 방 하나씩 있는 그런 집이면 될 것 같아. 이번엔 아빠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작은 방엔 햇살이 잘 든다. 그 빛을 보고 있으면 빨래가 잘 마를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처음에는 철제 행거를 놓았다. 어느 날, 새벽 세 시에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그 행거가 와르르 무너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행거를 원목으로 바꾸면서 방에 침대를 들였다. 온통 나무로 된 것들이 가득한 내 방이 참 안전하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던 집 중에 제일 작은 집인데도, 내 마음은 가장 넓어졌다.
개나리 노란색, 시루떡 팥색, 눈물빛 바다색을 거쳐 따뜻한 베이지색의 집에 살고 있다.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상처가 있다는 말, 아주 공감한다. 다 쓰진 않았지만 이 따뜻한 베이지색에도 아주 깊은 상처가 하나 자리 잡고 있으니. 하지만 무엇이든 오래 머문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 법 아닌가.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색깔이 있다.”
나를 재우고, 먹이고, 키우는 그 공간에 상처만 남아있지 않기를, 다만 어떤 기억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야하나 고민하는 요즘, 내 다음 집은 무슨 색일까 걱정 반 기대가 반이다. 그저 다음 색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색이면 좋겠다.
웹진 취향껏에서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