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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Dec 10. 2018

맛있는 인생을 위한 두 번의 퇴사

인생의 맛은 레시피가 결정한다

인생의 맛은 레시피가 결정한다


맛있는 요리는 레시피에서 차이가 난다. 복잡하고 어려운 레시피가 아니어도 된다.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라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고민하고 연구해서 신메뉴를 개발했다. 연세가 있으신 인근 상인들을 타겟으로 떡갈비와 함께 김치와 된장을 활용한 두 가지 햄버거를 내놓았다. 나름 고심하면서 만들어 낸 레시피다.


백종원은 햄버거 시식 테스트를 하자고 하면서, 자신의 레시피도 같이 테스트 받겠다고 했다. 떡갈비에 캐첩과 마요네즈, 양파만 들어간 기본 레시피였다. 결과는 백종원의 완승. 좋아보이는 재료들을 다 넣는다고 해서 좋은 맛을 내는 것은 아니다. 좋은 맛을 내는 재료들의 조합이 중요하다. 음식의 맛은 레시피가 결정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의 재료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맛이 달라진다. 처음부터 내 입맛에 맞는 최고의 인생 레시피를 알 수는 없다. 전문가가 알려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재료를 바꿔보고 조리 방법을 바꿔보면서 최고의 레시피를 찾는 방법 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연습하고 실험하는 가운데 행복한 인생을 요리한다.  



퇴사, 수저를 내려놓는 일


퇴사와 이직은 인생의 레시피를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다. 인생의 맛을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신중하게 선택한다. 퇴사와 이직은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일만은 아니다. 하루 절반의 시간을 어떤 일을 하며, 누구와 보낼 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내가 매일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나의 몸무게와 소득, 심지어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참고자료: TED.com /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사회연결망의 숨겨진 영향력)  그만큼 직장을 옮기는 일은 삶의 환경은 물론, 장기적으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두 번의 퇴사와 이직을 경험했다. 더 만족스러운 인생, 더 행복한 인생을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마치 바이오 리듬처럼 퇴사와 이직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가 있다. 그러다 다시 잠잠해지고 어느 날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직장생활은 내 뜻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사장님 뜻대로 움직이는 곳이니까. 내가 바라는 인생이 사장님이 바라는 인생과 같을 리는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더 이상 타협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때 퇴사를 결정한다. 맛을 잃은 요리 앞에서 드디어 수저를 내려놓는다.



깊고 진한 맛을 찾아서


첫 번째 퇴사의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20대에는 재밌는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일을 나름 재미있게 했고 연봉도 매년 올랐다. 마지막에는 팀에서 직접 스마트폰 앱을 만들어 한국과 미국 스토어 상위권에 올려 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는 일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가치를 추구하고, 그 가치를 통해 수익을 올려야 하는데 나는 늘 반대 방향으로 고민했다. 일을 통해 건강한 가치를 만들기 보다는, 어떻게 이익을 더 많이 낼 수 있을 지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제 먹고 살 만 해져서일까. 꼬박 꼬박 월급받는 것만으로는 내 삶이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았다.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일, 내게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할 때 비로소 나의 삶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인생의 레시피에 인공적인 조미료는 좀 덜어 내고, 건강한 재료를 더 넣어 깊은 맛을 우려내고 싶었다. 그렇게 5년 2개월의 첫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좋은 일을 해보겠다며 옮겼던 직장은 빈곤환경에 있는 아동청소년들을 돕는 비영리단체였다. 이 곳에서 6년 가까이 온라인 모금과 홍보 사업을 담당했다. 20대에 온라인과 모바일 서비스를 담당했던 경험을 살렸다. 하지만 연봉은 천 만원 정도가 줄었고, 직급도 막내 간사부터 다시 시작했다. 서른 하나였다. 당시 사귀고 있던 아내가 이직을 흔쾌히 동의해준 것이 신기하다. 결혼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직을 통해 내 삶의 환경은 급격히 변화했다. 하는 일도 만나는 사람도 몇 달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도움이 필요한 가정과 아이들의 사연을 온라인을 통해 전하는 일을 했고, 지역사회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았고, 일도 보람되었다. 나름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빈곤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가정과 아이들을 만나면서 많이 울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충분히 가치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겪으면 겪을수록 만만치가 않다. 인공지능처럼 늘 새로운 고민과 문제를 발굴해서 내 앞에 들이민다. 인생의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 순간 오답으로 판명나기도 한다. 두 번째 직장도 내 인생의 좋은 레시피였지만 항상 좋을 수는 없었다. 깊은 맛이 있었을 지는 모르지만 입이 즐겁지는 않았다. 서른 여섯의 마지막날 두 번째로 수저를 내려 놓았다.



퇴사를 위한 그럴듯한 변명


퇴사를 결정한 이유는 미래에 대한 두 가지 불안 때문이었다.


첫째는 조직의 미래가 불안했다. 특히, 조직이 적극적인 소통의 능력을 잃고 있다고 느꼈다. 조직에서의 ‘소통’은 인간 몸에 있어 ‘혈류’와도 같다. 피의 흐름이 멈추면 사람이 죽듯이, 조직의 소통이 막히면 조직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내가 있던 조직도 소통의 위기 가운데 있다고 느꼈다. 조직의 결정은 구성원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의견이 원활히 소통되고 논의되는 기회 자체가 없다면 구성원들은 조직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중간관리자의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소통의 빈곤은 세 가지 측면에서 조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먼저, 구성원들의 주도성을 약화시킨다.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고 조직의 성장을 이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하는 구성원들은 상명하달식 문화 앞에 의기소침해질 수 밖에 없다. 조직이 나의 고민을 거추장스러워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좌절감을 느낌과 동시에 수동적인 태도로 변한다.


두 번째는 조직의 문제해결능력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조직을 둘러싼 환경은 시시각각 변해가고 있다. 실적 지표가 하락할 경우, 조직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인 소통과 진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 경험에 발목 잡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독단적인 대안을 내놓으며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조직들이 있다. 조직이 가진 대표적인 강점이 집단지성이다. 함께 고민하고 토론을 통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만들어갈 수 있음에도 그 가능성이 차단된다.


마지막으로 소통의 부재는 조직에 대한 불신을 쌓는다. 우리 조직이 어떻게 문제를 진단하는 지, 대안은 어떻게 만들어갈 것 인지. 리더십의 생각을 알 수 없다면 실무 책임자로서 답답할 수 밖에 없다. 방향을 잃어버린 배처럼 출렁이는 파도 위를 떠다니는 일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직장인으로서 이 곳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을 지 의심스러워진다.


소통의 빈곤으로 인해 조직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끼면서 퇴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퇴사를 결심한 결정적 한 방은 다른 데 있었다. 어쩌면 소통의 부재 따위, 멋진 퇴사를 위한 그럴듯한 치장일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 레시피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족의 미래에 대한 불안, 무엇보다 경제적인 불안이 나를 흔들었다. 결혼 5년차. 아들은 다음해 다섯 살이 된다. 외벌이로 아직까지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애착관계 형성에 더 좋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이를 위해서도 내년부터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달 나오던 영유아 보육비도 마이너스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 뿐 아니다. 운이 좋게도 공공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어 몇 달 전 입주를 했다.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된 건 기쁜 일이지만 늘어난 월세와 관리비는 오롯이 내 월급이 감당해야 했다. 지금도 빠듯한 생활비에 한 달 한 달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 지 모르는데, 앞으로 여건이 더 나아지기는 커녕 어려울 것이 뻔히 보였다.

이 땅의 가난한 아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중요하고 보람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은 봉사와 헌신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강하다.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큰 규모의 단체나 정부/지자체 위탁 시설을 제외하면 비영리단체 종사자들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들 때도 있다.


특히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경제적 안정감을 줄 수 없다고 느낄 때 깊은 아픔을 느낀다. 아내와 아들에게 더 좋은 삶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물질적인 부분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일을 하겠다며 호기롭게 옮겼던 직장인데, 먹고 살 걱정으로 떠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아내와 아들, 이 두 사람만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너무 멋지잖아. 세상을 구하지는 못해도 이 두 사람만은 내가 구하고 싶어. 이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돕는 것도 멋진 삶이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들을 위한 삶도 멋진 삶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살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이 두 사람만은 행복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가족은 내 인생 레시피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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