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희 Dec 18. 2018

현실의 쓰나미를 막아내는 방법

내 마음의 둑을 지켜준 사람들에 대하여

현실의 쓰나미 앞에 선 우리들


삶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제서야 받아들여지는 삶의 진실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사람들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피하고 싶은 고통과 슬픔에도 맞딱뜨려야 하는 괴로운 시간들이 있다. 예측하지 못한 쓰나미가 방파제를 넘어 우리를 집어삼킬 듯 덮치는 것과 같이 삶의 고통들도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힘겨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소설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성실하고 긍정적이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의 인생은 참으로 가혹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덮쳐오는 삶의 고난들이 안타까웠다. ‘삶은 원래 이렇게 가혹하며 고통스러운 것일까?’ 왜 하필 이 소설책을 골랐는 지 후회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 성석제의 말이 내 마음을 깊이 위로했다.


현실의 쓰나미는 소설이 세상을 향해 세워둔 둑을 너무도 쉽게 넘어들어왔다. 아니, 그 둑이 원래 그렇게 낮고 허술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 이후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투명인간>(성석제 저/창비)


삶의 무게를 함께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함께 느끼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따뜻한 동지애를 느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소설이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고통받는 이들 옆에 서 있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의 둑을 지켜준 사람들


나는 인간을 살리는 것은 결국 연민과 사랑이라고 믿는다. 현실의 고난이 쓰나미처럼 몰려와도 내 옆에 '함께하는' 이가 있을 때 내 마음의 둑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반대로 아무리 돈이 많고 지인들이 많다고 해도 내 곁에서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그 사람의 둑은 쉽게 무너져 버린다. 스스로 이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랬을거라 짐작한다. 지옥 같은 마음을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고 그 지옥을 혼자서 버티다 결국 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비영리단체에서 일할 때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이 깨어진 환경에서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라난 청년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힘들었던 시기을 보내고 이제는 각 분야에서 사회인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원과 봉사를 통해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다시 나누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들이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같았다. 자신을 아껴주고 품어준 선생님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끼니는 거르지 않았는지 물어봐주고 짬을 내어 공부를 봐주었던 그 한 분 선생님의 연민과 사랑이 소중한 삶을 지켜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지칠 때 커피 한 잔 하며 삶을 나눌 수 있는 동료 한 명이 힘이 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마음이 해소된다. 해결되지 않는 업무 이야기를 흘려 듣지 않고 도움줄 방법을 찾는 동료 덕분에 힘이 난다. 여전히 직장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공감’ 해주는 그 한 사람이 내 마음의 문제는 해결해 줄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조직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때,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움을 받았다. 옆 부서 과장님 한 분과는 종종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처음엔 서로의 취미나 관심사를 주로 이야기했지만, 만나는 횟수가 늘면서 서로의 고민과 어려움을 나누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연들도 말할 수 있었다. 서로 업무로 엮이지 않는 부서라서 터놓고 이야기하기에 부담도 적었다. 그 한 분 과장님 덕분에 힘든 시기를 버티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그 과장님은 퇴사 하셨다. 내 하소연만 늘어 놓고 정작 그 과장님의 마음을 제대로 공감해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 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라는 오아시스


가장 괴로웠던 시기에 나를 숨쉬게 했던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내’ 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오늘도 고생했다며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아내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받으며 이런저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 비로소 마음이 쉴 수 있었다. 잠들기 두려운 밤마다 아내는 나를 아이처럼 품에 안고 토닥여 주었다. 메마른 사막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라는 오아시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 때, 아내도 똑같이 힘들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았다. 자신이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안함과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 것 같다. 내가 직장생활로 괴로워할 때마다 아내도 말 못할 아픔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내 마음과 감정만 보고 있을 뿐이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사실 매일같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는 내게 ‘그만두라’고 시원하게 한 마디 해주지 않는 아내가 서운하기도 했다. ‘나보다 돈이 더 중요한건가’ 싶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맑고 화창했던 토요일이었다. 회사 다니기 너무 힘들다고 투정을 늘어 놓으며 무기력하게 거실에 누워 있었다. 어린애 같은 투정이 길어질 데로 길어진 상태였다. 아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럼 어떡해. 회사 그만 두기라도 할꺼야?
당장 그만 두면 우린 뭐 먹고 살아?
나 정말 불안해... 자기가 회사 그만 둘까봐.


아내는 나를 불안해 했다. 집 안 살림은 모두 아내가 담당하고 있었다. 지출 규모는 더 커졌는데 갑자기 회사라도 그만두면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울 터 였다. 아내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그만두라’고 하면 정말 그만둘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아내가 적극적으로 직장생활을 말렸다면 퇴사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직장이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나도 회사를 무책임하게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냥 죽을 것처럼 힘드니까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나 스스로도 나의 무기력감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나를 먼저 생각해주지 않는 것 같아 서러웠다. 아내의 처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울음이 가슴에서부터 차올랐다.

“내가 돈 버는 기계는 아니잖아.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어. 그냥 ‘힘들면 그만둬도 돼’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런다고 내가 그만 두겠어? 나도 너무 힘드니까... 너무 힘드니까 그래.”

어른이 되어 그렇게 울어본 적이 언제 였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순간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꺼억 꺼억 울던 나를 보고 아내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애처롭게 쳐다 보더니 나를 아기처럼 품에 끌어 안아 주었다. 아내 품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아내는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향한 연민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미안해. 자기 믿는데... 나도 너무 걱정됐어. 자기가 항상 가족 위해서 고생하는 거 알아. 정말 고마워. 내가 자기 짐을 덜어줄 능력이 못 돼서 더 미안해...”

나는 삶에 느닷없이 덮쳐오는 쓰나미 앞에서 늘 두려워 했고 무기력했다. 마음의 둑은 금새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내가 울던 그 순간, 아내가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면 그 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마음을 한 번 더 돌아봐주지 않았다면 내 우울증은 더 깊어져 갔을 것이다. 돌아보면 누군가 늘 내 곁에 있었고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참 고맙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이 결국 빚진 인생이 아닐까. 나도 누군가의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이 되길 바란다. 내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그렇게.

이전 03화 행복을 글로 배웠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