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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희 Aug 20. 2019

외동은 안된다

가족계획과 생존본능의 상관관계

지금은 외동을 키우고 있지만 처음부터 하나만 낳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총각 때는 아이 셋을 선호했다. 결혼 초에는 아이를 둘 이상은 꼭 낳아야 한다며 아내와 의기투합했다. 어쨌든 내 가족계획의 원칙은 자식 하나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혼자가 익숙했던 늦둥이 막내


삼 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형과는 열 살 터울, 누나와는 여덟 살 터울이다. 형제들과 어릴 때 같이 놀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은 별로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형과 누나는 대학생 신분으로 타지에 있었고 방학 때나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나마 거의 잠자는 모습뿐이었지만. 그래서 내겐 형제가 있었지만 없었다. 존재했지만 존재감이 있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벽걸이 액자 속 가족들처럼.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다. TV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 게임도 하고. 너무 심심할 때는 친구네 집이나 놀이터, 학교 운동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우연히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그들과 어울릴 심산이었다. 웬만큼 가까운 친구가 아니면 집에 전화를 걸거나 벨을 눌러 ‘같이 놀자’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타인의 관심과 시간을 구걸하는 것 같아 싫었고 거절당할까 무서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깝게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다리 아프게 싸돌아다니다가 하늘이 어스름해지는 저녁 시간이 되면, 빈 망태를 들고 귀가하는 낚시꾼처럼 허탈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친한 친구들은 있었지만 단짝이라고 부를 만한 친구는 없었다. 같이 노는 게 재밌을 뿐 마음이 연결된 친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이어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다. 사실 난 혼자 노는 걸 좋아했고 가끔씩 외로움과 심심함을 달래줄 친구가 필요했던 것뿐이니까. 필요에 따라 적당히 인연을 만들고 적당히 인연을 끊었다.



형제, 흐릿함과 선명함 사이


인간관계에 대한 무관심과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이다. 마음을 이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관계를 지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가족의 인연은 자석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의 장점은 서로가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쿨한 관계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무관심한 관계이다. 특히 형제들 사이가 그렇다. 평소엔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내다가 명절 때와 부모님 생신 때 얼굴을 본다. 엄청 반가워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물론 형제들 간의 ‘끈끈한 정’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의 대소사를 치르면서 형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형제들의 존재가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하게 느껴지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그 형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십 대 후반에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1년간 투병 생활을 하셨는데 며칠 사이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엠뷸런스를 타고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장례를 치렀다.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이 모든 상황들이 슬프고 낯설며 당혹스러웠다.

누나와 자형이 먼저 장례를 준비했고 당시 미국에 있던 형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상을 치른 그 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조문객을 맞았고 화장장으로, 장지로 이동하며 아버지와 작별의 시간을 보냈다. 형과 누나가 그 시간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는 동지가 필요하니까


인생은 홀로 살아가기 버겁기만 하다. 그래서 함께 버텨낼 동지가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고 멘토를 찾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유다. 그럼 나처럼 인간관계가 피곤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홀로 도태되고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을까? 다행히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함께 할 동지는 끝까지 남아 있다. 바로, 가족이요 형제들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중요한 때에 곁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외동은 안된다’고 했던 내 가족계획의 원칙은 아마도 유전자의 생존본능 때문인 것 같다. 나를 닮은 아이라면 분명 인간관계에 취약할 것이고, 그렇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형제들이라도 있어야 하니까.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인간관계는 IT기술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계속 확장되고 있지만 순수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는 극히 소수이다. 당신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중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래서 난 전장 같은 인생을 함께 살아갈 ‘형제’라는 동지를 자녀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과거의 내가 다둥이 아빠의 소망을 품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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