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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는 습관에서 홀로서기

청년들의 홀로서기 응원가 4절

  올 초 남편은 자신의 선배가 쓴 전공서적을 영어로 번역해서 네덜란드 한 출판사로 보내기로 한 데드라인을 3년째 미루고 있다고 실토했다. 2월 말까지는 줘야 할 것 같은데 5%도 못했다고 자신의 게으름을 고해성사한다. 일전에 얄팍한 기독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넘기기로 약속한 시간을 여러 번 미루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이번엔 전공서적이지만 네이티브가 아닌데 영어 문장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3년을 미룬 것은 너무했다.


  수학 공부에 관한 재밌는 논문이 있다. 제목이 '수학이 고통스러운 순간(When Math Hurts)' 이다. 일반적으로 수학불안이 높은 학생들은 수학 자체가 힘든 과목이라고 생각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실제로는 수학공부가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불안이 높은 학생들은 수학공부를 계속 미루게 되는데 미루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이 점점 높아지다가 일단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하고 예측행동이 멈추면 불안은 쑥 내려간다는 것이다.


   습관적 미루기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미루기가 불안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안을 느끼면 생존을 위해 불안을 낮추는 방어기제를 쓴다. 불안을 다루지 않고 방치하면 극도의 긴장, 공포, 공황장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불안을 처리할 때 손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유튜브, 인스타, 넷플릭스와 같은 콘텐츠 소비이다. 유튜브 보는 한 시간 동안 불안이 일시적으로 낮아진다. 때로는 중요한 일을 미루기 위해 사소하거나 나중에 해도 되는 대체 행동을 찾아 불안을 낮추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불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대체행동이 끝나도 해내야 할 일은 그대로라는 사실에 직면하는 순간 불안은 더 높아진다. 미루기는 {불안감 → 딴짓 → 일시적 안정감 → 더 강한 불안감} 이라는 악순환의 굴레를 씌워 인간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출처: Flickr (CC BY ryan lee)


   미루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 당기기이다. 밀지말고 당겨라. 억지로라도 행동을 개시시켜 아래 그래프의 점선을 앞쪽으로 당기면 불안은 급격히 감소하고 불안의 총량도 줄어든다. 나는 번역이 힘들 것이라는 '예측' 행동을 끊기 위해 곧장 남편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선배가  원고 파일을 열라고 했다. 폴더에 들어간 적이 언제였는지 한참을 찾는다. 그리고 지금 당장   문장만 번역하라고 시켰다. 키보드가 달각거리며 영문  줄이 타이핑되었다. 'The South Korean Constitution adopts the principle of...' 그럼 다음 문장을 번역해보세요. 달각달각, 다음 문장, 다음 문장... 가끔 구글 번역의 도움을 얻기도하고, 사파리에서 단어 사냥을 다니며 얼추얼추  문단,  페이지를 완성한다. 불안은 줄어들고  일에 집중하게 되자 번역의 80% 이상을 마칠  있었다.  정도 진전 과정을 보여주면 출판사도 흔쾌히 20% 위한 마감을 연장해준다.

https://jamesclear.com/procrastination 를 참고하여 그림


  학창 시절 노트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는 성경구절을 써두고 게을러지려는 나를 다스리곤 했다. 다른 성경엔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리지만, 게으른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잠언 12장 25절)."가 있다. 나는 이 구절을 현대적 의미로 부지런한 사람은 불안을 다스리고, 게으른 자는 불안의 부림을 받는다고 해석하고 싶다.


  정신과에서도 습관적 미루기를 불안을 다루는 능력 부족으로 생기는 장애로 본다. 즉 불안장애의 증상 중 하나가 미루기이다. 대상이 명확한 두려움(fear)과 달리 불안(anxiety)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 생긴다. 이 시대의 청년들 미디어를 통해 많은 정보들을 받아들이는데, 대상을 직접 경험해보려 하지 않고 난무하는 정보들을 탐색하느라 잠재적 불안속에서 한 가지에 전념하지 못한다. 액체처럼 이곳저곳 흘러다니며 다른 대체 행동을 찾아 불안을 다스리려 하지만, 더 큰 불안의 늪으로 빠진다. 액체는 중력 방향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는 청년들이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공부나 일을 미루는 습관이 일상생활의 장애가 된다면 해방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일단 무조건 시작하는 것이다. 할 일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아 나중에 다시 해야 해도 괜찮다. 주변 정리가 안돼서 집중이 안 되더라도 일단 시작한다. 그러면 할 일이 서서히 명확해지면서 불안은 사그라든다. 액체가 되어 늪으로 갈 것이 아니라 단단한 고체가 되어 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쁨을 맛보자. 다만, 늪에 빠지는 것은 힘이 필요하지 않다고, 산에 오르려면 중력을 거스르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잊지 말자.  나도 이 글을 마치고, 미루던 기말고사 답안지 채점을 시작하고자 한다. 사랑스런 학생의 답안지를 꺼내 한 학기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하면서 1번 답을 먼저 읽어보는 것으로 한발짝 떼어보겠다.



Davis, P. (2021). Dedicated: The Case for Commitment in an Age of Infinite Browsing. 피트 데이비스 지음, 신유희 옮김 (2022). 상상스퀘어.

Lyons, I. M., & Beilock, S. L. (2012.) When Math Hurts: Math Anxiety Predicts Pain Network Activation in Anticipation of Doing Math.  PLoS ONE 7(10): e48076. https://doi.org/10.1371/journal.pone.0048076

제일 상단 그림  출처 CC BY SA (Flickr - Rachel Fisher)

(CC BY SA cRachel 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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