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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ka Aug 31. 2018

자유를 감싸 안다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선한 오지랖의 힘에 대한 믿음

노르웨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어디를 가든 휠체어 등이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경사로가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무거운 짐을 가지고 굳이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일상 속 모든 것이 신체적 장애나 이동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도 큰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약자에게 친화적인 곳은 누구에게나 이용하기가 편하다. 이를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제품, 시설, 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이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라고 고령자나 장애인들도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유럽 사회복지의 중심에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염두에 있다고 본다. 개인을 중요시하는 개인주의가 최상으로 발전하면 이런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부담을 지우지 않고, 자기도 타인을 책임지는 부담도 지지 않으며 개인으로서 살 수 있는 사회. 설령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부양 의무에 부담을 느껴 문제가 생기는 일을 방지하고 개인이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이 지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회복지도 한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의 폐단 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통해 지금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비단 신체적 장애뿐만이 아니라 정신장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회 안에서 통합을 지향한다. 스웨덴의 경우 장애인 거주 시설을 1999년 12월 31일 자로 완전히 폐지했다. 그리고 시설 폐지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칼 그루네발트 아동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보건복지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 시설과 전문 병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시설의 폐해를 폭로하고 시설 폐쇄 후 시설 거주인들의 독립적인 생활을 위해 추적 연구를 했다. 그는 장애보다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그가 마련한 다음의 세 가지 원칙에 잘 녹아있다. 첫째, 그 사람의 삶이 보통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정상화의 원리’, 둘째, ‘일상생활 보장의 원리’, 셋째, 지역 사회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거주 환경 조성의 원리’ 탈시설 정책과 더불어 ‘특정 기능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과 서비스에 관한 법(Law of Support and Service for Person with Certain Functional Impairments, 이하 LSS)’이 만들어졌다. 94년 제정된 것으로 여기에는 활동보조 서비스, 조언 및 기타 지원, 동행 서비스, 휴식 지원 서비스, 12세 이상 학생을 위한 단기 보호 서비스, 주거 서비스, 가족 또는 가정에서의 생활 지원, 주간 활동 등 10가지 서비스 제공을 규정하고 있다.(장애인 부모, 스웨덴에 가보았다, 프레시안)


이런 북유럽의 장애인 복지 정책을 보다가 우리나라의 뉴스를 보면 거리감의 수준이 정말 먼 것을 넘어 아예 다른 세계처럼 느껴진다. 일단 한국에서는 길에서 장애인을 보기가 쉽지 않다. 사회복지 수업에서 교수님이 아는 분이 북유럽에 갔다가 와서 "거기는 장애인이 많더라? 길거리에 휠체어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이 없는데."라고 하는 걸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고 사회에서 활동하기가 극도로 어렵기 때문에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집에 박혀 있거나 어떤 시설에 격리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나도 대학교에 가기 전까지 주변에서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고속버스나 지하철 이용에도 어려움이 있어 명절에도 이동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바로 그 사회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수준은 어디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의 경우 사회통합은커녕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학교 설립조차 땅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뉴스에서는 발달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나와서 무릎을 꿇고 제발 집 근처에 학교를 세울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으니 발달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한 지인이 떠올랐다. 그는 아이가 발달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울증에 걸려 몹시 괴로워했다고 하며 갖가지 방법들을 찾다가 최후의 보루로 이민까지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장애를 가진 게 죄도 아니고 전염병처럼 옮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나라 장애인들은 다 어딘가에 격리되거나 숨어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발달장애가 있는 성인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데이케어나 돌봄이 부족해서 서비스에 신청하고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 부모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떠난 후 발달 장애를 가진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느라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조승우가 나온 '말아톤'의 엄마처럼 발달 장애를 가진 자녀가 죽은 후에 다음 날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우리는 맨 몸으로 태어나 언제 약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운명을 살아가는 존재다. 전체 장애인의 89%가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 참가한 우리나라 국가대표선수들 36명 중 선천적 장애는 5명에 불과하다. 이를 제외한 대다수가 후천적 사고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사회복지 수업에서 시각 장애가 있으신 분을 하나 알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센터에서 도서 입력을 하는 봉사를 하기도 했지만 사실 직접 만나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분은 나보다 상당히 연배가 있으셨는데, 자기의 어려움을 서슴없이 이야기하시며 도움을 청하셨다. 비장애인으로서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다 보니 그분의 적극적인 피드백을 통해서야 맞출 수 있었다. 가끔 만원 버스에서 내려야 할 곳에서 정차하지 않아 내리지 못하고 지나칠 때 차마 민망해서 소리치지 못하곤 하는, 다소 소심한 성격의 인간으로서 나는 그분의 그런 당당함이 참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의 어려움을 꺼내어 이야기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그분의 옆에서 팔을 잡고 걷는 걸 도와드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시각장애에 관해 워낙 아는 바가 없는 터라 조심스럽게 여쭈어보니 그분이 처음부터 눈이 안 보이셨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억력의 한계로 유감스럽게도 그 이야기가 전부 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이 조금씩 상태가 안 좋아지다가 마침내 망막이 떨어지면서 눈이 멀어버렸다고 하셨다. 나는 조금만 내 몸이나 정신의 어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도 불편할 것 같은데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인간은 모두 언제나 약자가 될 수 있는 그냥 세상에 무작위로 던져진 존재들인데 몇몇의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우위에 서있다고 보고 그게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자기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 같다. 아니면 자기 자신조차도 벼랑 끝에 내몰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남에게 조금의 자비도 베풀 수가 없는 것일까?


경쟁이 치열한 세상을 살다 보니 내 코가 석자고 늘 내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다. 내 앞가림도 못 하는 마당에 다른 사람을 돕자는 게 오지랖 떠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회에서 원하는 경쟁력이란 과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하늘이 내린 천재 정도 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인간은 인공지능이든 뭐든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금까지 강조해왔던 지능이라든지 그런 것의 역할이 줄어들거나 바뀌게 될 것이다. 기계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경쟁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의 인간다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쯤 헤아려주는 것, 그것이 기계와 다른 인간이 가지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 사람들을 몇몇을 보면 프로그래밍한 기계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기계라면 적어도 프로그래밍을 한다면 그들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좋은 아파트나 비싼 땅 같은 게 아니고 (물론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이것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파하는 사람의 곁에서 그 사람과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본다. 우리가 다름에 대해서 배척할 때, 혹은 고통받는 이를 보고도 그저 남의 일이라고 팔짱 끼고 관망만 할 때, 그만큼 우리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움받지 못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복지에서는 그 당사자에게 권한을 부여한다는 임파워먼트를 강조한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장애인 분야가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나 그 주변인만큼 끈질기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장애인들이 늘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수동적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들은 장애를 가진 독립적인 개인이지만, 장애인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의 많은 시스템이 보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시스템이 생기고 보완될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자원이 필요하고 사회적 약자는 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자기가 처한 문제를 자기가 다 해결할 수 있는 이는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어느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사회적 약자라는 비교적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위해 인사이더가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다리를 못 쓰는 장애가 있는 조제라는 여자가 할머니와 둘이 살다가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조제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도움이 필요해서 그녀의 집 근처에 사는 변태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대가로 도움을 받는다. 그 사정을 알게 된 남자가 그녀에게 왜 그랬냐고 다그치자 그녀는 그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남자는 그때부터 그녀를 돕는다.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여자가 주체적인 개인으로 자립할 수 없는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남자는 그 무게감에 지쳐서 헤어지게 된다. 남자를 좋아하던 비장애인 여자와 조제가 싸우는 장면이 특히 인상에 깊게 남는데, 그녀는 조제가 장애인이라고 해서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제와 서로 뺨을 한 대씩 치고받으며 장애를 가진 여성일 뿐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얕잡아보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독립적인 개인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환경과 의식은 그 장애인과 그 주변인들의 삶을 모두 힘들게 만든다.


장애가 없다고 하는 비장애인 측에 속하는 나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느낀다. 사람들은 혼자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을 위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선한 오지랖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바꾸는 힘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가끔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한 인물이 있다  유치원에 같이 다녔던 아이들 중 기억나는 한 아이로, 지금도 이름이 또렷이 기억나는 동갑내기 친구들 외에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한 남자애다. 그 애는 내가 귀여워하던 나보다 어린 남자애로 덩치는 큰데 지금 생각해보면 발달장애인지 눈을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데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뭔가 소통이 되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이사를 가게 되어 갑자기 유치원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 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종종 생각이 나고 궁금해진다. 학교는 제대로 갔을지, 지금쯤 성인이 되었을 텐데 시설에 살거나 아니면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건 아닐지. 내몰린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뭐하며 사는지. 괜히 궁금하고 안타깝다. 어디에 있든 아무쪼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기를 그저 빌고 있을 뿐이다.





큰 어려움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계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주변에 찾아볼 수 있는 경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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