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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Jul 28. 2024

글자 연습

22년 어느 날의 기록 4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우리 애 한글 뗐어요 소식에도 동요하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한글에 관심을 보일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최근 이 기다림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는 진작부터 자기 이름 쓰기 연습을 시작했는데 카페 게시판에 올라온 아이들이 서툰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사진을 보던 중 어설프긴 해도 알아볼 순 있게 쓴 아이들과 달리 현이의 연습장 속 정체 모를 외계 문자들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보면서 따라 쓰라고 '장 현'이 진하게 프린트되어 있는데 글자 자체가 너무 낯설었던 것인지 수십 개의 칸들 중 제대로 된 'ㅈ'자 하나가 없었다.

집에서도 연계해서 쓰기 연습을 시키지 않으면 어린이집에서도 쓰기 힘들어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문자는 전체문자였지만 내 뇌리에 뜨끔 히 박혔다.


부랴부랴 연습장을 사고, 만 3세용 한글과 수학 학습지도 한 세트씩 주문했는데 뭘 사면서 이렇게 기대가 안될 줄이야. 아이한테 아직 공부 비슷한 걸 시킬 생각이 없었는데 타의로 얼떨결에 시작하게 되어서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영어 방문 교사였던 엄마가 영어공부를 시키고 테스트를 하곤 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교재가 찢겨 날아가고 깊은 한숨이 버무려진, 이렇게 하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무서운 협박을 귀에서 삐익거리는 이명소리와 함께 들어내곤 했었다.

그 시절 그리 할 수밖에 없던 엄마만의 사정을 지금은 적당히 이해하기에 이 기억은 그저 그 방식을 내 아이에게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고 깨끗하게 정리해 둔 내가 가진 유일한 학습적 소신의 근거이다. 이것 외엔 가진 재료가 없어 무방비상태인 나는 아이의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학습의 길을 이제 막 들여다보는 지금의 단계에서부터 저절로 아주 조심스러워졌다.


장현의 'ㅈ'자를 대체 뭘로 보고 쓰는 건지 얼토당토않은 그림을 그리고 앉아있지만 욱해서 다그치는 것 말고도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본다는 선택지를 잡았다.

그래서 얼마나 정확히 쓰나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고 방 밖으로 나와 열심히 뭔갈 쓰긴 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딱 예쁜 모습이다.

굳이 줌 인을 하면 공책 속 서툰 글자들이 보이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아이의 공부에 잦은 줌 인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아이는 스스로 연습하겠다며 앉았고 외계문자 반, 엇비슷한 그림 반이지만 공책 한 페이지를 다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다섯 살, 만 3세의 너는 충분히 대견하고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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