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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Feb 25. 2024

노노케 사회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사회

<노노케 사회>는  노인이 노인을 케어하는 사회라는 뜻으로 우리 시대 돌봄의 현주소를 말하는 신종어이다. 아마도 현 요양보호사 중 90% 이상이 60-70대 노인일 거라 생각된다. 장애인 활동지원사의 경우에는 40대 후반-50대도 간간이 보였다. 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므로 비교적 젊은 연령대에서도 이 일에 선뜻 도전할 용기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말이다.

<노노케 사회>는 알고 보면 참으로 비현실적인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체력이 약한 노인이 질병에 가장 취약한 노인을 돌봐야 한다는 뜻으로, 약자가 약자를 돌보는 현상을 말한다.

이 구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지난 팬데믹의 급박한 시간을 지나면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이런 기구한 상황의 한계를 목도했다. 코로나19는 노인에게 가장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약자가 더 약한 자를 돌보는 이 돌봄의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나.

얼마 전까지 60대 지인은 요양 병원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노인을 보살폈다. 코로나로 인해  노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 더 많아졌으므로 심정이 더 복잡했던 모양이다. 자신도 노인이 되어가는 길목에서 노인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란 어떤 느낌일까. 코로나의 전이가 죽음의 전이처럼 공포와 불안으로 더 고조되어 다가오지는 않았을까? 그런 그녀는 체력의 한계와 심적 스트레스로 근무 일수 1년을 채우고 퇴사했다.

이처럼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 때 돌봄 일을 그만둔 노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로서 돌봄 인력은 부족했고 환자나 장애인이 있는 가정들은 돌봄 독박을 해야 했다. 특히 중중 발달장애인을 둔 부모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이어지기도 했다.

소위 우리 가정은 ‘감기가 뭐야?’라고 할 정도로 전염병에 강한 부류였다. 그런 나는 J를 돌보기 시작하자마자 우리 가족 중 코로나에 첫번째로 걸렸다. 나 때문에 휴가를 나왔던 둘째가 군 복귀를 1주일 늦추어야 했다. (둘째는 바라던 바라며 좋아했다.) 남편과 첫째도 줄줄이 걸려서 우리 가정도 코로나에 그만 함락되어 버렸다. 그 뒤로도 남편과 나는 J로 인해 두 번째 코로나에 걸렸으며, 역시 J가 전염시킨 아데노바이러스에 남편과 함께 걸려 고생했다. 그뿐인가 J는 독감 및 감기에 수시로 걸려 입퇴원을 반복했다. 내가 만약 전염병에 취약한 사람이었다면 정말 공포 그 자체였을 것 같다. 하물며 노인 돌봄 노동자가 전염병 시대에 전염병에 가장 취약한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얼마나 더 위험천만한 일이었던가.

또 작년쯤인가? 우리 동네에서 열린 <눈 깜짝할 사이, 돌봄 수다회 시리즈> 중 첫 번째 시리즈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첫회는 ‘직업으로서의 돌봄’을 주제로 열렸는데 전, 현직 요양 보호사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노동 현장의 목소리와 생각들을 들어보는 자리였다. 초대된 요양 보호사들은 70대 노인이었고 나는 이분들을 통해 요양 보호사들이 대부분 70대 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돌봄 노동이 주로 일자리 경쟁에 취약한 여성이나 노인의 일자리로 자리매김한 것이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 경력단절 된 여성의 경제활동의 길을 그나마 넓혀 준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삶을 충분히 살아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돌보아 본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 삶에 유연해진 노인 여성들처럼 말이다. 한마디로 돌봄 노동은 케어의 기술을 요하는 여성의 특화된 직업이다.

그럼에도 이 돌봄 노동 환경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름 아닌 고강도의 체력전인 이 돌봄을 나이 든 여성들이 도맡아 하기엔 역 부족이다. 이유로 대부분 돌봄 노동자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환자나 장애인과 매칭하고자 하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체력의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중증 장애인들은 부모가 직접 케어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이렇다 보니 돌봄 노동 현장에서도 체력이 좋은 젊은 인력이 절실한 것이다. 이 체력전에서 젊은 사람도, 남성도 함께 돌보는 세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헛된 희망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간호사 직업이 젊은 여성과 남성에게도 인기 직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돌봄 노동의 세계로 젊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까? 돌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확산이 필요하다. 젊은 사람도 돌봄 노동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먼저 근무 환경이 되겠다. 이 일에 있어 근무환경이란 장애인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학습공간도 좋고 치료실도 좋을 것이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이나 환자들에게 돌아가는 복지가 곧 돌봄 노동자들의 좋은 근무 환경이 된다. 두 번째, 임금이다. 이 환경으로는 젊은 인력을 이 세계로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두 가지만 해결이 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젊은 인력 또는 남성들이 돌봄 노동 시장에 투입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내가 근무하는 재활치료병원은 공간은 물론이고 치료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정말 잘되어 있다. 보호자(돌봄 노동자)나 환자(장애아동)가 대기하는 휴게 시설도 잘되어 있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길게는 6시간을 이곳에서 치료를 받게 되는데 각종 치료를 한 건물에서 받을 수 있다. 몸이 불편한 장애아를 데리고 이리저리 동분서주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활동지원을 하는 돌봄 노동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고 남자 활동지원사들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노인의 일자리도 좋지만 더 중요한것은 돌봄은 젊은이든 노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 모두의 일이고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는 노노케의 비현실적인 현상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재고해야한다. 더 늦기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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