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무료한 기분을 날리고자 #인생역전 이라는 태그로 영화를 검색했다. 검색한 영화 중 ‘라스트 홀리데이’를 골랐다. 주인공 조지아버드는 가벼운 사고를 계기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위해 모아둔 돈을 털어 꿈만 꾸던 고급호텔로 떠난다. 삼시 세끼 좋아하던 쉐프의 음식을 먹고, 고급 스파를 하고, 스키점프에도 도전한다. 물론 카지노에서도 어마어마한 돈을 딴다. 그 후에 사실은 진단이 잘못되었고, 사랑도 찾고 꿈도 이루는 다소 뻔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물론 뻔한 스토리였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라 '유서수집'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아, 한 번쯤 저 언니처럼 여행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역전을 이루지는 못해도 카지노에서 내 운을 테스트해보고 싶어졌다. 겨울의 끄트머리인 2월 말, J언니와 정선으로 급카지노 여행을 떠났다.
PM 1:05
서울에서 2시간 반을 달려 1시쯤 호텔 근처 번화가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호텔안에는 비싼음식점밖에 없다고해서 편의점을 들리기로 했다. 저녁에 먹을 맥주와 과자 몇개를 골랐다. 대낮부터 토토, 로또용지에 마킹을 하는 사람이 5~6명쯤 있었다. 후즐근한 차림새에 언뜻봐도 수십장에 마킹을 하고 있었다. 으스스하고 기분나쁜 풍경이었다. 얼른 계산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PM 1:32
겨울 막바지라 저렴한 가격에 좋은 방에 묵을 수 있었다. 갈색과 진한 오렌지색이 어우러진 방이었다. 디자인이 고급스러운 욕조, 두껍고 푹신한 매트리스로 된 싱글침대 2개와 소파 2개가 놓여있었다. 창밖으로는 태백산맥이 보이고, 저녁에는 방에서 불꽃놀이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지아 버드의 스위트룸에 비할 건 아니었지만 호캉스를 만끽하기엔 충분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뭉그적대다가 4시쯤 카지노로 내려갔다.
PM 4:02
신분증을 내고 카지노 입장권을 샀다. 호텔 내부는 한산한데 카지노 안은 온통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평소 겁쟁이이기도 하지만 혹시나 분위기에 휩쓸려 큰돈을 쓸까 싶어 현금은 5만 원만 갖고 들어갔다. 슬롯머신, 블랙잭, 이름 모를 게임들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슬롯머신처럼 기계를 마주하고 앉아서 하는 게임을 제외하고는 테이블 위에 판돈을 걸고 딜러가 게임을 운영하는 식이었다.
“자, 다음 판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딜러의 말과 함께 테이블의 격자무늬에 얼마인지 모를 색색깔의 칩이 겹겹이 쌓였다. 여기에서는 코 묻은 돈이겠지만 나도 마음에 드는 숫자에 걸어보고 싶어 손을 뻗었다. 있는 힘껏 뻗어보았으나 아저씨들 등쌀에 밀려 테이블은 만져보지도 못했다. 한 번 더 뻗으려 하니 아저씨들이 ‘어딜 코 묻은 돈을 놓으려고 해?’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PM 4:35
아 뭔가 잘못됐다. 내가 모르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게 있는 건가. 경쟁이 치열한 테이블인가 싶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딜러가 게임 시작을 알리고 고액 판돈을 거는 사람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는 숫자 '23'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진 천 원짜리 초록색 칩을 마음에 드는 자리에 놓으려 하자 앞자리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건 이 게임에 못 쓰는 칩이야.
(피식 웃으며) 아무도 안 알려줬지?
그때부터 아저씨는 J 언니와 나에게 테이블에 칩은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 테이블의 무수히 많은 숫자는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주셨다. 그리곤 재미로 소액만 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셨다. 아저씨가 설명해준 후로 이천 원은 사천 원이 되기도, 사천 원은 다시 0원이 되기도 했다. 코 묻은 돈으로 땄다 잃기를 반복하며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게임 대행을 해주는 건지 메신저로 전달받은 숫자에 칩을 걸었다. 잃었다가 또 잃었다가 한 번에 크게 따기도 했다. 물론 그 후에 또 잃었다. 커다란 장지갑(흔히 일수 가방이라 말하는)을 든 40대 남자는 한 게임마다 오만 원 뭉치를 던졌는데 아마도 어림잡아 백만 원인 것 같았다. 5분에 한 번씩 백만 원이 가방에서 테이블로 던져졌다. 그는 30분도 안 돼서 모든 판돈을 잃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