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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Jun 09. 2020

브루클린, 너마저?

2018. 11. 5. 열다섯째 날


 미국 드라마에서 많이 본듯한 3층짜리 붉은 목조 주택. 벌써 세 번째 숙소다. 호텔, 한인 민박에 이어 마지막 거처는 퀸스의 에어비앤비로 정했다. 퀸스라고 해 봤자 맨해튼에서 한 정거장이고, 고작 다리 하나 건넜을 뿐인데도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맨해튼-캐나다-퀸스-브루클린을 넘나드는 여정이라니. 정말 알찬 여행이라니까. 그리고 혹시 알아? 호스트와 맥주 한 잔 기울이며 근황 토크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최소한, 동네 주민들만 아는 맛집 정보는 캐낼 수 있겠지.


 길 위에 놓인 다섯 개의 짐가방을 아빠에게 잠시 맡겨두고, 호스트에게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두근두근. 사진 속 호스트는 인상도 좋고 사진작가라는 점에서 우리 부녀와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았다. 아빠는 화가고, 나는 디자이너라고 꼭 얘기해야지. 우리도 당신처럼 창작의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산다 이거야. 오, 문이 열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Chris예요. 호스트인 Orestes가 여행을 가서 집에 없어요. 제가 대신 집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이것 참, 허무한듸. 자기소개에 여행을 자주 다닌다고 쓰여 있긴 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좀 아쉽네. 행여나 친해지면 캘리그래피 족자라도 하나 선물할까 해서 아빠 가방에 붓과 먹물을 챙겨 왔건만.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쪽에 있는 문을 사용하시면 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자동으로 잠기니 주의하세요. 외출할 때는 잊지 말고 이 창살이 달린 문을 열쇠로 잠그고 나가셔야 해요. 위험한 지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늘 조심하고 있답니다.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면 잠기고, 왼쪽으로 돌리면서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문이 열려요.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와, 집이 정말 예뻐요!"

"여행을 많이 다니는 친구라, 전 세계에서 수집한 소품들로 집을 꾸며 놓았죠."

"이건 그분이 직접 찍은 사진인가요?"

"네, 맞아요."

"재능이 뛰어나신 분이네요. 진짜 멋져요."

"멋있는 친구죠. 자, 여긴 화장실이고, 스팀 샤워도 있답니다."


 스팀 샤워!? 사진에서 본 것 보다도 훨씬 더 멋지다.


"아빠, 우리 그거 드려요."

"그럴까?"

"자 여기, 선물이에요. 이 그림은 아빠가 부채 위에 직접 그리신 거예요. 하나는 당신 거고, 하나는 호스트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편히 쉬다 가세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민트색 벽과 붉은 벽돌로 꾸민 집 안에는 집주인의 예술적인 감각이 묻어나는 소품들로 가득했다. 훔치고 싶다. 물건 말고, 그의 취향과 센스 말이야.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 커다란 작업실과 연결된 정원까지 완벽해. 내가 꿈꾸던 드림 하우스다!



"아빠, 어때요? 집 진짜 예쁘다."

"그래. 미국 사람 집은 처음 들어와 보는데, 집주인이 감각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맞아요. 직업이 사진작가래. 이런 거 보면, 우리 집도 예쁘게 꾸미고 싶어져. 집이라는 게 실용성도 좋지만 이렇게 보는 맛도 있으니까 좋다. 여행 나와 보면 알겠어. 내가 진짜 여유 없이 살고 있다는 거. 그건 그렇고. 일단, 뭐라도 좀 먹으러 갈까요?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추천 맛집을 써 놨을 텐데. 어디 보자..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여기로 가면 되겠다."


 가방들을 대충 바닥에 던져 놓고, 탁자 위에 놓인 가이드북 뒷장 맨 첫 번째 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현지인 추천 맛집'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익숙해진 우리의 레스토랑 패턴.


 1. 뜨거운 물과 수프는 반드시 주문할 것

 2. 맥주는 나만, 아빠는 한 입만

 3. 딸이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동안(네. 인증샷 촬영이요.) 알아서 대기 타 주시는 아빠의 수저를 든 손

 4. 갑자기 들이대는 카메라 렌즈를 향해 아빠가 포즈를 취하고 나면

 5. 자연스레 건네받은 핸드폰으로 딸 사진도 몇 장 찍어주시고, 식사 시작.



"맛있다. 그치? 여기 맛집 맞네."

"그래. 잘 먹었다. 이제 뭐 하러 갈 거냐?"

"비가 오니까, 미술관을 가야죠. MoMA PS 1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 예전에 아빠 혼자 뮤지엄 투어 갔다가 나 잠드는 바람에 혼자 택시 타고 돌아오신 날 있죠? 그때 갔던 미술관이 MoMA였잖아요. 뮤지엄 오브 모던 아트. 거기랑 제휴를 맺은 미술관이 여기 근처에 있거든요. MoMA보다 훨씬 더 실험적이고 개성 있는 현대 미술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한대요. 나도 못 가봤어."

"현대 미술은 나도 어렵더라."

"아빠도 모르는 게 다 있어요?"

"모른다기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야 해석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지. 다다이즘을 대표하는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 알지?"

"그건 나도 알죠. 명색이 미대생인데."

"처음에 그거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냐?"

"음.. 솔직히 맨 처음에는 도자기 만드는 사람의 작품인 줄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 하지만 그 작품은 하물며 작가가 만들지도 않았어. 그냥 아무데서나 파는 남성용 소변기에 작가가 서명만 해서 전시장에다 갖다 놓은 거야.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이 와서 보면 이게 무슨 미술 작품이냐면서 노발대발할지도 모르지.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유명한 줄 아냐?"

"그 전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지! 뒤샹이 처음으로 그런 개념(공산품에도 작가가 의미를 부여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을 창시했기 때문에 그 작품이 높이 평가받는 거야. 세상에 없던 걸 창조하는 게 예술가의 숙명이거든. 근데 생각해 봐라. 이미 고전 미술에서 나올 건 다 나왔는데 자꾸 새로운 걸 하려니까 얼마나 난해한 시도들을 하겠냐?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도 창작의 영역에 넣으려니까 고달프지. 만드는 작가나, 해석하는 관객이나."


 동서양 미술사를 술술 읊는 아빠를 볼 때마다, 한국에서 아빠랑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박물관 투어다. 웬만한 도슨트 보다도 아빠가 훨씬 더 쉽고 재밌게 설명해 줄 것을 알았기에 버킷리스트에 적어 놓았었는데. 뉴욕에서 한풀이 좀 하나 했더니만 아쉽게도 메트로폴리탄이나 MoMA같이 유명한 미술관은 함께 가보질 못했네. 괜찮아. 담에 가지 뭐.


"음.. 지금 전시 중인 작가가 브루스 나우만이래요. '그는 살아있는 것의 도덕적 해이와 전율을 전달하기 위한 형태를 개발하는데 반세기를 보냈다..' 진짜 뭔 말인지 모르겠네. 일단, 감상하시죠! 감상! 모름지기 예술이란 마음으로 느끼는 거 아니겠어?"

"그것도 맞지."

"뭔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도 이 네온 작품이 맘에 드네요. 집에 걸어놓고 싶어. 몇십억쯤 하겠지?"
"그렇겠지."

"아빠도 이런 작품 좀 만들지. 나 덕 좀 보게."

"나도 네 덕 좀 보게 이런 것 좀 만들어다오."


청출어람이라지만, 우리는 예외다. 난 아빠 입담 못 이겨.


"아빠, 이거 봐. 난 이런 게 좋더라. 제 취향이 좀 그로테스크하거든요."

"난 징그러워. 아름다운 게 좋아. 웬 동물들을 이렇게 매달아 놨을까."

"예술가들이 징그러운 거 많이 만들지 않아요? 괜히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글쎄, 이유가 더 중요하겠지.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예전에 대학원 시험을 보는데 말이다. 내 친구가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그림 한가운데 떡하니 붙여놨지 뭐냐?"

"헐! 대박. 완전 목숨 걸었네. 예술가는 원래 그래야 하는 건가? 그 정도로 간절하게! 작품을 위해서! 자기 손가락도 잘라 붙일 정도로..!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붙었어요? 붙었겠지?"

"떨어졌어."

"아이고! 왜요? 불쌍해!"

"비밀이야."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은 예술가의 오브제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4층짜리 건물을 샅샅이 훑고 다니면서 부녀간에 예술적인 교감은 충분히 나누었으니, 이제 윌리엄스버그로 갈 시간이다.


 1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늘 힙스터를 꿈꾼다. 여기서 힙스터란? 잊을 만하면 들춰보는 네이버 사전. '1940년대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유행 같은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를 이르는 말'이다. 한 마디로, 주변의 시선과 기준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똑같은 뿔테를 쓰고 스키니진을 입는 등 그들만의 길이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종종 문제가 되긴 하지만)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면서도 늘 생각만 할 뿐,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남들 눈치만 살피며 살아온 내게 힙스터는 오랜 로망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비싼 월세에 떠밀려 온 것도 있지만, 굳이 맨해튼 거주민을 고집하지 않았던 이유는 브루클린이 그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베드퍼드 애비뉴 역이 있는 윌리엄스버그는 두말할 것 없는 힙스터의 성지였다. 맨해튼과 부동산 시세가 비슷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여서 원하던 지역에 방을 구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그쪽을 서성거리며 힙한 기운을 얻어가곤 했다. 해는 떨어진 지 오래고 비까지 내리는 바람에 을씨년스럽긴 해도, 찾아올 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한때 영감을 얻기 위해 즐겨 찾던 독립 출판 서점이랑, 벽화들, 작은 앤틱 상점, 라이브 바가


"다 어디 갔지?"

"여기서는 뭘 보면 되냐?"

"음.. 일단 벽화가 조금 남아있긴 하네요. 근데 여기가 원래 안 이랬는데.. 달라. 너무 달라졌어. 원래 이런 분위기 아닌데. 여기가 옛날의 홍대 같은 곳이란 말이야. 예술가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

"예술가들이 비 와서 다 집에 갔나 보다."

"아니, 진짜로! 심각해. 어머, 저게 뭐야? 세포라에, 애플 스토어, 티모바일!? 시티 뱅크도 있네. 홀푸드까지!?"


 뭐야. 여기 완전 맨해튼이네. 이거 완전 전형적인 가로수길의 몰락과도 같은 모양샌데. 애플 스토어가 생기면 그 동네 다 (내 기준에서) 망하나 봐.


"아빠, 오늘의 힙스터 투어는 실패예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내가 너무 옛날 생각만 하고 왔네. 원래 여기 안 이래. 다시 알아볼게요. 걔들(?), 멀리 안 갔을 거야."



 배신감과 아쉬움을 잔뜩 안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익숙한 간판이 보인다. 에? 아티초크?


"오! 저거 사가 자!"


 내가 기억하는 한, 아티초크 피자는 L Train의 1st Ave. 와 3rd Ave. 역 사이에 있는 어마 무시한 피자 맛집이다. 3rd Ave. 역 앞의 트레이더 조에서 산 2달러짜리 와인을 가방에 집어넣고, 피자집까지 두 블록 걸어가서 아티초크 피자를 한 조각 시켜 입에 물면 그 순간만큼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꾸덕꾸덕하고 느끼한 치즈와 묘한 아티초크의 맛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쉑 버거와 초콜릿 피자의 뒤를 이어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먹어줘야 하는 나만의 힐링 푸드' 리스트에서 빠진 적이 없다.


 아빠가 피곤하다는 걸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할 만큼 신이 나서 자그마치 세 조각을 포장해 왔다. 숙소에 있는 전자레인지로 따뜻하게 데운 피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아..! 아티초크 너마저..! 왜 너마저 예전 그 맛이 아닌 거냐..! 정말이지 울고 싶은 맛이다. 만든 지 오래돼서 그런가? 원래 이 치즈가 이렇게 고무 조각처럼 딱딱하지 않았다고! 믿었던 윌리엄스버그에 배신당한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아티초크까지 통수를 치다니.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브루클린에 '야속한 세월 몽둥이'로 신나게 얻어맞는 날이다.



 대안이 필요해. 힙스터의 기운을 받고 돌아가야 한단 말이야. 아마도 싸진 집세 때문에 예술가들은 저 멀리 도망쳤겠지. 멀리는  갔을 거야. 다급히 인터넷을 뒤지자, 포스트 윌리엄스버그이자 진짜배기 힙스터들의 성지라며 익숙하지만 예상치 못한 지역명이 등장했다. 그러고 보니 여행을 떠나기  이곳을 추천했던 지인의 목소리가 얼핏 귓가를 스친다. 거기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10 전에 집을 구하러 갔었던  지역은, 낮에도 쉽게 범접할  없는 게토였으니까.


 부시윅, 너만은 나를 배신하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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